[보람에 산다] (4) 군산법률상담소...白恩基(백은기) 소장
[보람에 산다] (4) 군산법률상담소...白恩基(백은기) 소장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5.11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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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일 살피기 35년

 빈곤과 절망으로 암울했던 시대의 작은 등불이 되어 희망과 구원의 빛을 비춰오기 35년. 어두운 사회의 곳곳에 아침의 빛을 밝혀온 ‘사랑의 여신’이 있다.

 白恩基(백은기·62)여사. 현재 조산원장겸 한국가정법률상담소 群山상담소 소장이다.

 “별로 내세울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찾아간 기자에게 白소장이 걸어왔던 희생과 봉사의 어려웠던 35년을 들려주려 하지 않았다.

 “중앙고보와 동덕여고에서 교편을 잡다 38년 전남 광산군에 應世(응세)농토학원을 설립, 가난하고 못배운 농촌학생들을 가르쳤던 친정아버지의 영향이 컸었지요”

 白소장은 社會사업에 뛰어들게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하며 겨우 말문을 열었다.

 白소장이 첫 사회봉사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은 1·4후퇴 때부터.

 당시 군산시 해망동에 있던 피난민수용소에는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로 인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피난민들과 전쟁고아들이 사랑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白소장은 이들의 어려운 생활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그래서 당시 미국의 퀘이커 교단에서 보내 구호사업과 진료활동을 펴고 있던 ‘친우 봉사회’에 조산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 白소장의 사회봉사활동에 내디딘 첫 걸음이었다.

 거기에서 조산원으로 활동하기 3년여.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白소장은 1954년 7월 군산시 명산동에 조산원을 개업, 어려운 산모들을 돕는데 발벗고 나섰다.

 지금까지 白소장이 받아낸 신생아는 모두 1만여명. 군산시 인구수 20명중 1명은 白소장의 손안에서 첫울음을 터뜨린 셈이다.

 당시는 출생률도 높았고 유아사망률도 높았던 때. 당연히 白소장이 하는 일엔 많은 어려움이 따랐고 절망에 부딪쳐 포기하고 싶었던 때도 많았단다.

 그러나 白소장은 천성적으로 불행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성격에 한번 생각한 것은 꼭 해내고 마는 억척스러움도 같이 지니고 있었다.

 조산원으로 활동하기 20여년, 70년대 중반들어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생활이 다소 윤택해지고 가족계획운동과 보건의료 보호 측면의 제도적 완비로 인해 白소장의 할일이 대폭 축소되었다.

 그래서 白소장은 1978년에 경장동 쓰레기처리장으로 들어가 당시 어렵게 살고 있던 9가구 주민들과 마음을 합쳐 새마을사업에 뛰어들었다.

 白소장의 억척스러운 성격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지금은 건물이 가득 차 상전벽해가 되었지만 그때 새마을부녀회장으로 열심히 일했어요. 보람으로 최우수마을 표창도 받았지요”

 그러나 이것도 5공화국에 들어서면서 새마을사업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새마을부녀회가 일부 정당에 사조직화 돼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자 白소장은 다시 손을 털고 가정법률상담소를 차려 가난한 영세민을 돕는데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가난하고 못배워 억울하게 당하며 사는 이웃을 도와 인간의 존엄성이 중시되는 만인평등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 취지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끝에 白소장은 기어이 금년 7월19일 군산상담소를 전국에서 11번째로 개소하게 되었다.

 “이일은 순수하게 200여 회원들의 대가없는 지원으로 운영해 나갑니다. 상담도 날로 늘어나 지금까지 4개월 동안 벌써 421건의 상담을 통해 어려운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며 白소장은 활짝 웃었다.

 오직 사회봉사의 외길로 인고와 희생의 길을 걸어온 백은기 소장.

 白할머니의 자랑스러운 얼굴에서 기자는 사랑과 봉사로 깃들어진 숭고한 생활철학이 있음을 깨닫고 인간으로서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헌성 記
 김재춘 옮김
 1988년 12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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