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명장 최 호장군 423주기에
임진왜란의 명장 최 호장군 423주기에
  • 이복웅 (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20.04.2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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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의 공신이며 명장인 전북 출신 최호장군이 순국한 지 올해로 423주기가 되는 해다. 최호장군은 중종 32년(1532) 경주 최씨 최치원의 15대손 최한정의 4남으로 임피현 바르메(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최호의 아버지 최한정은 명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월곶진 수군첨절제사와 벽동군수를 지냈다. 최호는 선친으로부터 무장 수련을 하여 선조 5년(1572년) 9월에 무과 병과에 급제, 선조 7년에는 무과 중시 갑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또한 최호는 강진 현감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임란 직전에는 오위도총부도사 직을 맡았다.

 선조 25년(1592년) 임란으로 선조가 의주로 서천하는 어려움 속에서 절충장군 정3품과 이어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종3품)를 받아 왜군의 주력부대와 싸웠으며 그후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 1596년(선조29년) 4월9일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충청도 수군을 총괄하였다. 이때 선조는 최호에게 교지와 삼인보검(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소장)을 하사 받는다. 같은해 7월 충남 홍산에서 일어난 이몽학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1597년)때는 삼도수군의 선봉장으로 칠전량 해전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 소방장, 배홍림등과 용전분투하다 그해 7월15일 장렬하게 62세로 전사했다 선조37년(1604년) 청란공신 이등공신으로 책록과 계성군으로 봉군되었다 시호는 충원공이며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선영에 안장 되었으며 장군을 추모하는 충의사(지방기념물 32호)가 있다. 임진왜란 출발부터 급박했던 왕의 의주 서천에 선조를 호위하였던 최호장군의 행적과 당시 상황읗 살펴 보도록 한다.

 선조 25년(1592년) 4월13일 오전 8시경에 왜장 고니시의 선봉대 1만8천700명과 병선 700여척의 대선단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쓰시마의 이즈하라항을 출항을 한다. 선봉대 고니시 선단은 같은 날 오후5시경 부산 앞바다에 그 모습을 나타나게 됨으로서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4월14일 부산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또다시 2만여명의 정애부대로 진격 4월15일 동래성을 함락 시켰다. 그 여세로 왜군은 주력 부대를 동로, 중로, 서로로 나누어 주요 도로를 따라 서울을 향하여 북진하였다. 한편 서울에서는 17일 새벽 경상우수사 박 홍이 띄운 왜군의 침공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공포 분위기 속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잇달아 들려오는 비보는 경상도 여러 고을이 차례로 함락되었다는 소식뿐이었다.

 죽령, 조령, 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하여 이 일 등의 장수들이 나섰지만 파죽지세로 북상해 오는 적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 일이 4월24일 상주에서 적을 막지 못하고 패하여 도망 갔다는 급보가 올라 오자 도성안은 인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이로써 선조는 피난 갈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궁중에서는 천도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각도의 군사로 하여금 도성를 지키도록 명령하였으며 또 사람을 보내어 군사를 징집해서 서울로 집결토록 하였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4월29일 밤 충주에서 보고는 신립이 싸움에서 패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종실과 대신들의 논의는 국왕이 일단 평양으로 피난할 것을 결정한다 4월30일 새벽 왕은 드디어 서천에 올랐다 왕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두운 새벽에 세자 광해군과 1백여명의 수행원을 대동하여 돈의문(서대문)을 나서서 북행길에 올랐다. 왕과 세자는 말로, 빈은 가마를 타고 서대문을 나올 때 여자 시종 10여명이 통곡하며 뒤를 따랐고 도승지 이항복이 등불를 밝혀 선도 하였다. 왕을 따라 나선 신하들은 제각기 흩어저 혜음령(경기도 백제면) 고개를 넘기 이전에 하나둘씩 도망하여 한성으로 되돌아갔다. 이때 최호는 오위도총부 종5품직인 도사 교지를 받은 지 2년9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오위도총부는 조선조때 5위의 군무를 총괄하던 관청이다.

 최호는 서울을 떠나는 무질서 속에 왕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소수 병력을 지휘하여 어가를 무사히 행군할 수 있도록 지휘하였고 호위부대 임무외에 다른 임무까지도 위임을 받는다. 왕은 최호가 지휘하는 소수부대의 물 틈새 없는 경호와 엄호속에 안전하게 행군을 할 수 있었다. 최호 장군은 왕과 그의 수행자들을 안전하게 북행할 수 있도록 경호, 경계에 최선을 다하여 마침내 6월30일 서울를 떠난지 한달만에 의주에 도착하였다. 이때 왕의 뒤를 끝까지 따라온 사람은 관리 24명, 환관10여명, 액정원 4·5명, 사복원 3명이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여 있다. 최호 장군과 함께 선조의 호가를 맡아 충절을 다한 전북 출신으로는 최충겸, 김천록, 전언룡 그리고 최산립 등이 있다. 매년 5월 장군를 기리는 추모제가 충의사에서 열린다. 왜국(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고자 한 최호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이 도민의 정체성 확립에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이복웅<(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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