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처럼 방탕해져서
나비처럼 방탕해져서
  • 경종호 시인
  • 승인 2020.04.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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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8>

 한옥마을, 전주 향교 은행나무는 노란 장판을 깔아놓은 듯했다. 그 향교가 내려 보이는 언덕 위에 자취집이 있었고, 서른 무렵이 있었다.

 아침 안개가 도시를 덮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풍경을 가진 높고 작은 집. 누군가의 지붕이 내 마당이었던, 그 집. 버스럭거리는 바람이 불어대는 해 질 녘, 한벽루를 향해 거슬러 오르는 젖은 걸음이었다. 스며들 듯 어두운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에 햇살이 무게를 얹던 11월 말, 늦가을이었다.

 서서학동과 한옥마을 사이로 남천교가 있었고 그 아래 전주천이 흘렀다. 내 서른 살 즈음이 말라가는 물길 속에 흘렀었다. 무작정 허무하기만 했던 시간이었고, 늦가을이면 우울에 떠는 신열이 가라앉아 있던 물길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내 서른 살이 흐르고 있을 것 같은 그 물길 속에 이 노래가 있었다.

 ‘서른살 즈음’하면 사람들은 김광석을 먼저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그 계절이 서둘러 만들어내던 서서학동의 그늘과 막다른 골목 끝에서 언제나 희미한 틈과 가느다란 빛줄기를 보여주었던 노래, ‘꽃구름속에’.

 박두진 시인의 시에 작곡가 이흥렬이 곡을 붙인 가곡이다.

 1997년 무렵이었으리라. 조수미의 목소리로 처음 들었다. 수능 문제집에선 화려한 봄을 노래하는 시라고 풀이했던 듯한데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그 이후로도 늦가을이면 이 노래에 빠져들곤 했다.

 시를 좀 더 알고 싶어 우울과 슬픔을 안고 살던 서른 즈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의 선택은 왜 한 번도 나를 위로해주지 않는 걸까, 하며 술을 마시던 마흔 즈음, 청춘만이 가졌을 것이라 생각하던 불꽃이 쉰 즈음에도 남아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다시 시를 써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오래된 고요의 시간과 함께 찾아왔다. 거의 십여 년의 마디마다 툭 튀어나오곤 했었다. 언제나 스산한 바람이 서둘러 해를 지워버리는 11월이었다.

 어쩌면 조수미의 목소리가 가진 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시인이라는 얼굴을 흘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난 내게 있는 고요를 보지 못하는 것만 같다. 아니, 못 본 척하는지도 모른다. 무작정 앞으로 다가올 고요만을 그리워하는,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고요를 그리워하며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그 고요를 이 노래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에서 만날 수 있을 것도 같아 또 다행이라 생각한다.

 가사는 가사대로, 곡은 곡대로, 목소리는 목소리대로 가만히 가만히 다가오는 노래

 

 꽃바람 꽃바람 마을마다 훈훈히 불어오라

 복사꽃 살구꽃 환한 속에 구름처럼 꽃구름

 꽃구름 화안한 속에

 꽃가루 흩뿌리어 마을마다 진한 꽃향기 풍기어라

 

 추위와 주림에 시달리어 한겨우내 움치고 떨며

 살아온 사람들 서러운 얘기 서러운 얘기

 아 아 까맣게 잊고

 

 꽃향에 꽃향에 취하여 아득하니 꽃구름속에

 쓰러지게 하여라

 나비처럼 쓰러지게 하여라.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땐 두 번째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목소리와 리듬이 가사와 어우러지고 나는 그 속에서 내게 어울리는 우울을 앓고 있었던 듯 했다.

 그런데 마흔과 쉰을 지나며 점점 그보다는 세 번째에서, 아니 첫 번째 부분에서 슬픔을 더 많이 보고, 우울을 만나기도 한다. 가사? 리듬? 목소리?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엔 카세트, 두 번째엔 CD, 세 번째엔 핸드폰. 십여 년의 시간을 건너 나에게 다가올 때마다 몸을 바꾸어 오겠지만 만 나는 언제나 제자리, 그대로의 몸덩이뿐일 것이다,

 요즘도 내가 조금은 더 서럽고 싶어질 때면 문득, 문득 이 노래를 찾곤 한다. 조금 더 고요하게 방탕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글 = 경종호 시인

 

 ◆경종호

 200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15 『동시마중』 동시 발표, 동시집 『천재시인의 한글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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