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75> 차와 설탕의 만남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75> 차와 설탕의 만남
  • 이창숙
  • 승인 2020.04.2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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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다기셋트와 차와 설탕-피에테르 판. 노에스트라텐 작
중국 다기셋트와 차와 설탕-피에테르 판. 노에스트라텐 작

  16, 7세기부터 유럽에 유입된 식품류들은 다시 상품이 되기 시작한다. 차, 커피, 초콜릿, 담배, 설탕 등 기호품에서 감자, 토마토 등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식품들이 유럽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러한 식품들은 약으로, 때론 악마의 식품으로 의사와 종교인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차나무잎으로 만들어진 차는 유럽인들에게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특히 프랑스는 차를 ‘금세기의 가장 부적절한 음료’라고 비난하는 의사들까지 있었다. 시몬 파올리는 중독성과 유해성분이 있어 이를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프랑스의 극작가 장 라신(1639~1699)은 만년에 아침 식사와 함께 차를 마셨으며, 귀족들은 그들만의 스타일을 버리고 영국식으로 차를 마셔 보기도 한다. 하지만 차보다는 그들의 전통 음료 와인을 택한다.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늦게 차를 접하게 된 영국, 차를 판매하는 광고가 1658년에 등장한다. “중국인들은 차(ch’a)라 부르며, 다른 나라 사람들은 테이(Tay)라 부르는 수많은 의사들이 추천하는 중국의 차를 런던 왕립거래소 부근 커피하우스에서 팔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다. 당시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여성들은 들어갈 수 없었으며 이후에도 남성들의 사교 장소로 계속 증가하였다.

  차는 너무 고가(高價)여서 귀족, 신분이 높은 상류층, 돈 많은 상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차나무 한 그루조차 재배할 수 없는 나라 영국, ‘홍차의 나라’라는 타이틀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 많은 이유가 있으나 여기에 일조를 한 식품은 설탕이다.

  설탕은 약품, 장식품, 향료, 감미료, 보존료 등으로 쓰였다. 무엇보다도 칼로리가 놓은 설탕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효과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었다. 12세기 비잔틴 제국에서 일했던 의사들도 설탕에 절인 장미꽃잎을 해열제로 사용하였다. 병이나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일 때 ‘설탕이 떨어진 약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설탕은 약품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단식기간에 ‘설탕을 섭취하는 것이 율법인가 아닌가’라는 논쟁에서 토머스 아퀴나스(1224~1274)는 설탕은 식품이 아니라 소화촉진을 위한 약품이다. 설탕을 먹었다고 단식을 어겼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 후 설탕은 토머스 아퀴나스도 인증한 약으로 인식되었다. 18세기 이후부터 설탕을 지니치게 섭취하면 몸에 해로울 수도 있다는 의학적 견해도 나왔지만 설탕 생산과 섭취는 급속도로 확산된다.

  설탕의 소비는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수입하는 차의 소비와 관련된다. 즉 설탕은 차와 관련된 물품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시아 동쪽 끝에서 만들어진 차와 서쪽 끝 카리브해에서 만들어진 설탕이 영국에서 만난 것이다. 설탕은 장식품이나 약품인 귀중품으로 서민들은 맛볼 수 없는 사치품으로 인식되었고 먹고 싶은 식품이었다.

  이렇듯 차와 설탕은 신분과 부의 상징물이었다. 부를 축척한 영국의 상인들은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사치를 하였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귀족들은 상인들보다 화려하길 원했다. 소비는 더욱더 경쟁이 되었고 저택과 패션의 유행까지도 서로 다투었다. 귀족, 젠틀맨, 부유한 상인들은 국제시장을 통해 들어오는 진귀한 상품을 먼저 구입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이러한 물품 중에 차와 설탕은 대표적인 물건이었다. 씁쓰름한 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부의 상징이었다. 영국에서 차를 마시는 습관은 왕실에서 시작되었다. 1662년 찰스 2세의 아내가 된 포르투갈의 공주 캐서린 브라간자의 역할이 컸다. 그녀는 지참금으로 인도 봄베이와 일곱 척의 배에 가득 실은 설탕, 그리고 차를 가져왔다. 그녀의 차 마시는 모습은 귀족과 상류층 여성들에게 부러움이 되었고 유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영국에서 차를 마신다는 것은 고품격의 취미를 의미하였다. 당시 파티를 자주 즐긴 귀족들은 파티가 끝나면 남성들은 술을, 여성들은 차를 마시며 사교를 즐겼다.

  이러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은 동인도 회사는 해마다 생산된 차를 왕실에 진상하였다. 왕실에 납품하는 차는 홍보에 적극 활용되었고 차와 설탕은 최고의 신분을 상징하는 귀중한 사치품이 되었다.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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