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명의 소리 - 독립운동가 고치범
소설 대명의 소리 - 독립운동가 고치범
  • 노령
  • 승인 2020.04.0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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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특집)

 돌아보니 참으로 아득한 세월이었다.

 숨 가쁘게 살아온 인생이었지만 참으로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고치범은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이제 세상과 작별해야 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같이 동거 동락했던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유치장에 수감된 지금, 고문의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체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몹시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독립의군부 단장인 임병찬에 대해 들려온 불길한 소식 때문에 마음은 더욱 심란했다. 임병찬은 붙잡힌 뒤 총독과 일본정부 총리대신과의 직접면담을 요구하며 항쟁하다 거문도로 유배되었는데 벌써 몇 차례나 자결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고치범이 임병찬을 만나게 된 것은 스승인 면암 최익현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스승 면암은 을사의병에서 전북을 대표하는 의병장이었다. 구한말 강직한 신념과 상소로 유명한 면암을 많은 유림학자들이 따랐다. 고치범도 그 중 한명이었다. 면암은 고치범을 유달리 아꼈다. 용감하게 의병활동에 참여한 점도 컸지만 면암은 그의 문장솜씨를 유독 높이 샀다. 그래서 면암은 그에게 팔도사민 창의포고문을 작성하게 하여 전국에 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고치범은 그 일을 완벽하게 완수했다. 고치범이 면암을 기억할 때 동시에 떠오르는 장소는 바로 무성서원이었다. 가장 뜨겁고 또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했던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1905년에는 통감부 설치와 을사늑약으로 자주외교권이 상실된 상태였다. 이에 고치범은 매우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스승인 면암이 의진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면암은 태인 일대를 중심으로 삼아 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한 다음, 이미 정산을 떠나 태인으로 향했다는 전언을 받았다.

 면암 일행이 도착한 날은 1906년 4월 16일이었다. 고치범은 고석진 노병희 등과 함께 종성리까지 나아가 일행을 맞이하였다. 당시 면암 일행은 김태원 임현주 김경하 오상철 그리고 임병찬의 아들 응철과 손자 진등이었다.

 이들 면암 의진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강회하고 의거를 결의했다. 그에 많은 유생들이 면암의 의진에 합류했다. 마침 고치범은 최제학, 최학령 등의 의사들과 함께 군사를 모집하고 무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그가 휘하 의병 30여명을 거느리고 면암 의진에 합진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면암 의진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출정했다. 무성서원을 떠난 의진이 태인 관아로 행군하자, 군수 손병호는 그 기세에 눌려 도망쳤다. 무혈입성 직후 향교로 들어가 관아의 무기를 접수하고 전력을 강화시켰다. 태인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정읍을 향해 행군했다. 정읍 군수 또한 항복하여 태인에 이어서 정읍도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의진은 내장사에 들어가 유진하였고, 군세는 삼백 명 규모로 늘어났다. 내장사를 지나 순창읍으로 진격했다. 순창군수 역시 항복함으로써 순창 관아에 본부를 설치했다. 의진의 전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순창에 입성하여 관군과 대치중에 전주와 남원에서 출동한 진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의병들은 죽을 각오로 싸웠으나 훈련받지 않은 자들이 대부분이어서 결국 완패하고 말았다.

 초개처럼 죽음으로 산화한 부하들의 모습을 고치범은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던 고치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분해서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고, 회한에 젖은 슬픔인 것도 같았다. 순창에서 패한 후 면암과 마지막까지 그를 따르던 문하생 수십 명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의거를 주동한 면암과 임병찬 등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면암은 이미 노환이 깊어져 운명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돌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면암은 저항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73세의 고령에 단식을 감행했고, 급기야 풍토병에 걸려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고야 말았다.

 그 소식을 접한 고치범은 오랫동안 통곡했다. 그는 스승의 애국심과 의기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새롭게 마음을 다잡았다. 멀리 계신 면암을 그리며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어 보낸 것도 그런 의지의 표현이었다.

 

 정성스럽고 효도하고 충성됨이 자청에 맞으니

 자청이야 응당 대명의 소리 감동시키리

 높은 물결 돛대를 바람 순한 날에 돌이키니

 마둘가리 다듬어 중생건지려고 애썼네

 

 한편 임병찬은 의병활동 중 체포되어 면암과 함께 일본에 유배되었다가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고종황제가 그를 은밀하게 불렀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살려내는 일에 같이 힘을 써보자고 그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고종의 밀조를 받은 임병찬은 1913년 9월 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전라도 지방에서 결성되어 서울과 전국으로 퍼진 비밀 독립운동단체였다.

 왕의 뜻을 받아든 임병찬은 곧바로 일본 수뇌부에 국권반환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내는 등 행동을 개시했다. 또한 대한제국 왕정을 복고하는데 목표를 두고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준비했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부 관리 등에는 일본의 한국 강점의 부당함을 알리는 ‘국권반환요구서’를 발송했다. 전국 360여개 처에서 일제히 국권반환과 일본군 철병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립운동을 시도하고 있던 임병찬은 의병으로 같이 활동했던 고치범을 의군부로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 그를 천거했고, 고종은 고치범에게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직을 칙명하사했다. 스승을 황망하게 떠나보내고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던 고치범에게 독립의군부의 중요한 관직을 맡긴 것이었다. 그가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고치범은 임병찬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심인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고치범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러나 독립의금부의 활동을 끈질기게 추격하던 일경에게 노출되어 고치범은 체포 수감되고 말았다.

 수감된 고치범에게 가한 일경의 고문은 무지막지했다. 일경의 고문은 독립의군부의 조직을 탐지하여 모조리 소탕하려는 작전이었기 때문에 악랄하게 자행되었다. 마침내 단원 김창식이 체포되면서 조직은 발각되었고, 순무총장겸 사령장관인 임병찬도 일본경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독립의군부는 자연히 해체되었다.

 옥중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치범은 땅을 치며 분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평생 도모했던 독립운동은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깨어있는 후손들이 있는 한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죽는 순간까지 굳게 믿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치범은 눈을 감았다. 앞장 서 걸어가는 면암 최익현의 당당한 모습이 보였다. 스승님!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마지막 말이었다. 얼굴엔 평온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노령(소설가,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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