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동화 불꽃으로 타올라 지키리라 - 유종규
독립운동가 동화 불꽃으로 타올라 지키리라 - 유종규
  • 김영
  • 승인 2020.04.02 1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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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특집)

 □ 어린 시절

 공덕리 마현부락은 양반들이 주민의 대부분이어서 누구나 어렸을 때부터 글을 배웠다.

 어린 종규도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오늘은 뭐 하고 놀다 들어오는 길이냐?”

 “네 공부마치고 벼농사가 다 끝나 벼 이삭도 줍고 친구들과 가위 바위 보해서 이긴 사람이 자기 땅을 넓혀가는 놀이를 했습니다.”

 “친구들과 놀면서 벼 이삭은 줍지 마라. 감나무의 감도 다 따서 먹지 말고, 밤골 산에 가서 놀 때에도 떨어진 알밤은 다 주어오지 마라. 동네 어르신들이 지나가는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떼어 놓은 것인데 너희가 장난으로 줍거나 다 가져오면 안 된다. 그래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느냐.”

 “제가 꼴찌를 하는 바람에 땅이 너무 좁아서 속상했습니다.”

 “그래 마음이 어떻더냐?”

 “시작할 때는 땅에 넓이가 같았었는데, 연길이랑 흥갑이가 잘 해서 제 땅이 좁아졌어요. 그래서 더 넓히려고 했던 욕심은 없어지고 처음 가졌던 땅을 되찾기가 바빴어요. 그런데 잃어버린 땅을 찾으려는데 쉽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잠시 눈을 잠시 감으셨다.

 종규는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특별히 잘 못 한 것 없는데도 고개까지 숙이며 아버지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한 침묵이 방을 한번 휘감고 가더니 나지막이 종규의 이름을 부르셨다.

 “종규야 ~”

 “네 아버지.”

 “네가 놀면서 잃은 땅을 생각해도 속상한데, 만일 우리나라가 물밀 듯 밀려오는 서양 사람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면 어찌되겠느냐? 우리는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단다. 현재의 자유가 없어지고 구속을 받게 된단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를 지배한 사람들에게 구속당하고 억압받고 핍박 받는단다. 나라가 없다는 것은 부모가 안 계신 것보다 더 서럽단다. 지금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문에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할 까 걱정이구나.

 종규는 아직 어려서 아버지가 설명해주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알 수 없었지만,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무언가 엄청난 일이고 자유가 없다는 것만큼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자 공부하자.“

 아버지께서 책을 펴셨다.

 그 어떠한 날보다 종규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

 아버지는 영리하고 의협심이 강한 종규를 학교에 보냈다.

 혼자 공부하다가 여러 친구와 함께 공부하고 신학문을 공부하니 더 재미있었다.

 특히 우리나라 국어에 관심이 많았다.

 

 □ 독립운동

 종규의 나이 46세가 되었다. 일본은 갖은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나라를 괴롭히더니 마침내 국권을 유린하였다. 우리의 국권을 일본이 강제로 빼앗아가는 을사늑약을 맺은 것이다.

 경향 각지에서 애국지사와 뜻있는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일어섰다. 종규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나라를 잃으면 어찌 된다는 것을 뼈에 새길 정도로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각오로 종산(鐘山)에서 거의할 것을 의논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누군가 ”종규야!“하고 조용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전거포집 아저씨였다. 옷에 기름때가 가득하고 늘 헝클어진 머리에 겨울이면 어린아이처럼 항상 코를 훌쩍거리는 아저씨를 종규는 좋아했다.

 ”아저씨~“

 ”쉿~!!!“

 아저씨는 길 가던 종규를 낚아채 자전거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퀴퀴하게 뒤섞인 자전거 기름 냄새가 비위를 상하게 하였지만, 아저씨의 손길에 뭔가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져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자전거를 고치는 점포 뒤편의 밀실 같은 방으로 종규를 데리고 들어갔다.

 늘 다니던 가게였지만, 이런 밀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종규는 순간 두려움이 앞섰다.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얼굴이 굳어있었다.

 밀실 같은 작은 방에서 사다리를 타고 천정의 문을 연 아저씨는 종규를 다락으로 밀어 넣었다. 깜짝 놀랐다. 태극기가 방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좁은 어둑한 방에 떡집 아저씨, 담뱃가게 아저씨. 엿장수 정수 씨가 앉아있었고, 비렁뱅이 한석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항상 귓불을 잡혀서 이집 저집 끌려 다니던 비렁뱅이 한석 아저씨는 가운데 앉아있었고, 다른 분들은 양옆으로 앉아있어서 자리 배치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침 한번 삼키기도 어려운 분위기였다.

 떡집 아저씨가 먼저 아는 체를 해주셨다. 그런 다음 모두 인사를 건네주시니 이제야 전에부터 알고 있던 어르신이라는 느낌과 함께 안도감이 들었다.

 몸을 구겨서 아무 데나 앉았다. 좁은 공간의 분위기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종규를 데려온 자전거포 아저씨가 무거운 공기를 밀고 들어오셨다. 다락의 문이 닫히고 희미한 불은 더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종규야.“

 ”네?“

 비렁뱅이 한석 아저씨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높은 톤의 목소리였는데 중저음으로 내는 목소리는 뭔가 압도적인 목소리였다.

 ”우리는 독립투사다.“

 ”네?“

 “요즈음 네가 하는 일을 나도 안다. 다음 달에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최익현 선생이 항일의병을 일으킨다하네. 마침 자네가 무성서원의 소임을 맡고 있으니 최익현 선생의 거병을 돕는 것은 어떤가?

 “우리는 이곳에 사는 주민과 힘을 모아 일본과 대항할 것이네. 동네에는 일본 앞잡이들이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에 그들을 빼고 나머지 순수 우리 주민들로만 항일운동을 할 것이네. 그러니 호남지방에서 거병하는 최익현 선생을 도와 항일항쟁을 이어가게.”

 최익현 선생의 항쟁 얘기에 쭈뼛 쭈뼛해지는 머리를 정리하느라 종규는 혼자서 숨이 가빴다. 차분히 하나하나씩 한석 아저씨는 얘기해주었다.

 종규는 이집 저집에서 왜 인심 후하게 한석 아저씨를 데리고 들어가서 밥을 챙겨 주었는지. 한석 아저씨가 왜 비렁뱅이 노릇을 하며 남의 집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는지.

 왜 온 종일 남의 집 벽에서 몸을 기대고 누워 있었는지. 그동안 한석아저씨의 행동이 모두 이유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집에 어떤 사람들이 드나드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더럽기만 하던 한석 아저씨 옷이 장군 옷보다 더 멋있어 보였다.

 종규는 태인의 종석산 아래 살고 있는 최익현 선생의 제자 임병찬을 만나 나라의 앞날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며 서로의 의기를 북돋아주었다.

 1906년 윤4월에 무성서원에 내려온 최익현 선생의 의병들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태인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도 최익현 진에서 간부로 활동한 병찬과 종규의 역할도 컸다.

 종규에게 맡겨진 일은 일제의 무력탄압에 항거토록 인원을 동원하는 임무였다.

 종규는 무성서원의 소임이었기 때문에 태인 지역에 사는 유림들과 나라를 사랑하는 주민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종규는 그들에게 일본에 대항할 것을 전파하였고, 그 사람들은 다시 이웃에게 전달하였다.

 태인을 점령한 최익현 선생의 의병진은 세력을 키워갔지만 결국은 대한제국의 지방군인 진위대와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최익현 선생과 그의 간부들이 봉기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모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906년 7월 8일 종규는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12명의 동지들과 일본의 대마도에 도착하여 위수영(衛戍營) 경비대에 구금되었다. 최익현 선생은 1906년 11월 17일 단식으로 순국하셨고 종규와 12명의 제자들은 온갖 고초를 다 겪다가 귀국하였다.

 

 □ 3·1운동

 귀국 후에 일본 경찰은 틈만 있으면 종규 선생을 감시하고 괴롭혔다.

 “이보시오 유종길 뭐하시나?”

 감자를 캐고 있는 종규 선생에게 일본 경찰이 소리치며 물었다.

 “보면 모르오. 감자 캐고 있지 않소. 감자가 잘 영글어 캐는 것도 보고해야하오?”

 이 말을 들은 일본 경찰은 갑자기 화를 냈다.

 종규 선생의 모든 것을 다 빼앗고 싶어 하는 못된 마음이 생긴 것이다.

 때마침 지나가는 동네 사람을 붙잡았다. “여보시오. 당신 집은 어디요?”

 “나 이 마을에 사오.”

 “당신 이제부터 이 감자밭 주인 하시오.”

 “네? 이 감자밭은 종규 선생님의 밭인데 제가 왜 이 감자밭 주인을 합니까?”

 “명령이오. 이 감자 오늘 다 당신이 가져가시오.”

 종규 선생은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일로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야했다.

 

 1919년 종규 선생은 어느 새 환갑을 맞는 나이가 되었다. 나라 잃은 설움과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받은 고문으로 몸은 병들어 있었지만, 나라사랑의 열정은 청년시절보다 더 간절했다. 주권 없는 나라, 껍데기뿐인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섣불리 어디에 가담하거나 나설 수도 없었다. 누구와 교분을 쌓거나 왕래하기도 어려웠다. 일본경찰의 감시가 워낙 심했기 때문이었다. 속앓이만 하며 지내고 있던 어느 날, 동네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온 집안사람들이 곧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해주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쁜 소식에 가슴이 두방망이질해댔다.

 

 “대한 독립 만세~!!!!”

 이 나라 모든 사람이 외쳤다. 온몸을 쥐어짜며 울분을 토해내며 외쳤다. 대한독립을 외치는 소리가 산과 들에 퍼져나갔다. 산천도 감동하여 하늘에 외쳤고, 그 외침을 들은 하늘 또한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

 온몸으로 열창하는 대한 독립만세는 찬 얼음에 싸여있던 온천지를 다 녹였다.

 종규 선생도 나라 빼앗긴 설움과 그동안 독립투사들이 겪었을 고생을 생각을 하며 목청 높여 만세를 불렀다. 선생은 곱게 숨겨둔 태극기를 꺼내 들고 하늘에 대고 크게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김제 김영(시인, 전북시인협회 회장 역임, 김제예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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