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자존시대 연다> (6) 봉수를 이으면 사람·돈이 모인다
<전북자존시대 연다> (6) 봉수를 이으면 사람·돈이 모인다
  • 곽장근
  • 승인 2020.04.0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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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은 1500여년전이나 ICT시대를 살아가는 현재나 없어서는 안될 인류의 자산이며 인간의 최대 무기이다. 다만 소통을 무엇으로 나누느냐하는 수단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봉수나 ICT를 연결하는 중계기 설치 위치는 모두 지대가 높은 곳으로 인간에게 적절하게 소통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진다. 물론 현대는 인공위성까지 발달해 땅이 아닌 곳까지 설치하고 있다는게 다를 뿐이다. 그래서 봉수를 정보통신기술 즉 ICT의 최초 수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북가야 봉수왕국

 봉수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써 변방의 급박한 소식을 중앙에 알린 통신제도요 수단이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통신제도가 발달하기 이전까지 개인정보를 다루지 않고 오직 국가적인 정치·군사적인 정보만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봉수는 국가를 상징하는 가장 진솔한 고고학적인 증거물이다.

 삼국유사에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봉화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 10년 봉현을 비롯하여 봉산, 봉산성 등이 등장한다.‘일본서기’에 가야왕국 반파국에 513년부터 백제와의 3년 전쟁을 치르면서 봉후(수)를 운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시대 봉수의 존재와 함께 당시 봉수제가 운영됐음을 추론해 볼수 있다. 이와같이 삼국시대 봉수가 유일하게 학계에 보고된 곳이 전북 동부에 유일하다.

 

 ▲봉수 종착지 전북가야

 현재까지 전북 동부지역에는 모두 106개의 봉수가 학계에 보고 되었으며 모두 남원시와 장수군 등 전북가야 영역과 모두 일치한다. 특히 이 모든 봉수는 최정 종착지가 장수군 장계분지로 통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봉수와 봉수를 이어주는 봉수로는 출발지와 종착지가 있다. 또한 최종 종착지에는 국가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대형고분이 있어야 한다. 남원시 운봉읍, 무주군, 진안군, 완주군, 임실군, 순창군, 충남 금산군에서 각각 시작하는 여러갈래의 봉수로가 장수군 장계분지에서 만난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전북가야의 지배자 무덤으로 알려진 가야 중대형 고총 420여기,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하던 제철유적 200여 개소, 여기에 100여개의 봉수가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또한 장계분지로 향하는 봉수는 여러 갈래의 교통로를 따라 선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제철유적의 밀집도가 높은 지역을 통과 한다는 사실이 당시의 시대상을 반증하며 유적·유물과 연계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방희 기자

 

 ◆전북가야 봉수 찾기 프로젝트

 우리나라 통신유적의 백미로 알려진 조선시대 봉수는 대부분 거대하고 정형성을 띤다. 그러나 전북 동부지역에서 발견된 봉수는 시원형으로 그 규모가 작다. 1,000년 동안 전북 동부지역 삼국시대 봉수가 발달하여 조선시대 봉수를 탄생시켰다. 이제까지 전북 동부지역에서 가야 봉수를 찾고 알리는 프로젝트는 문헌조사와 면담조사, 현지조사, 추가조사 등 네 단계로 진행됐다.

 우선 문헌조사는 문헌과 학계의 연구 성과를 정리 분석하는 단계이다. 우리나라 봉수제는 1149년 조진약의 상소로 처음 시행되어 문헌의 기록이 풍부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전북 동부지역 가야 봉수는 반파국이 513년부터 백제와 3년 전쟁을 치를 때 봉후(수)를 운영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다만 봉화산과 봉수대산, 봉우재, 봉화골 등의 지명이 그 존재 개연성을 넌지시 알렸다.

 다음으로 현지 주민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는 면담조사이다. 우리나라에서 단일 지역 내 봉화산의 수가 가장 많은 곳이 전북 동부지역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봉수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봉화산이 가장 밀집된 것은 가야 봉수의 존재를 반증해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1500년 전 봉수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봉수를 찾는데 큰 힘이 됐다.

 모든 지표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현지조사이다. 문헌 및 면담조사의 내용을 면밀히 정리 분석한 뒤 직접 유적을 찾는 과정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전북 동부지역을 제외하면 삼국시대 봉수가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북 동부지역에서 한 개소의 봉수를 찾는 현지조사는 끝없는 탐험의 연속이다. 지금까지 100여 개소의 가야 봉수를 찾아 세상에 알리는데 2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로 했다.

 가야 봉수 찾기 지표조사에서 화룡점정과 같은 추가조사이다. 조선시대 봉수는 최전성기에 만들어져 그 규모가 웅장해 추가조사가 거의 필요치 않다. 그러나 삼국시대 봉수는 그 규모도 작고 정형성을 띠지 않아 대부분 추가조사를 추진해야 한다. 진안 서비산 봉수는 세 차례의 추가조사를 더 실시한 뒤 그 존재를 학계에 알렸다. 어떻게 보면 삼국시대 봉수를 알리는 것은 고고학자의 모험과 열정의 성과물이다.

 고고학에서 가장 고단한 연구 방법이 봉수를 찾는 지표조사이다. 일단 해발 1000m 내외 되는 산을 올라야 하는 산행 못지않게 어느 산을 오를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더 어렵다. 만약 조사단에서 선정한 산을 힘들게 올랐는데 봉수의 흔적이 없다면 산을 내려오는 길은 그 자체가 큰 고통이다. 그만큼 봉수가 자리 잡은 산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한 줄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 전하는 이야기도 풍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지표조사를 실시했더라도 가야 봉수로 최종 결정짓는 것은 발굴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남원 봉화산, 장수 영취산·원수봉·삼봉리, 완주 탄현, 임실 봉화산 봉수가 발굴을 통해 가야 봉수로 밝혀졌다. 장수군 내 가야 고총 출토품과 상통하는 6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가야토기만 나왔다. 최근 완주 탄현 봉수가 전라북도 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됐고, 지금도 가야 봉수에 역사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다.

 끝으로 봉수는 국가의 존재와 함께 국가의 영역을 가장 솔직히 대변해 준다. 이제까지 삼국시대 가야 봉수가 유일무이하게 학계에 보고된 곳이 전북 동부지역이다. 전북 가야의 영역도 봉수망에 그 근거를 두었다. 우리나라 봉수의 요람지이자 1500년 전 ICT왕국이 전북 가야이다. 향후 가야 봉수에 태양광을 설치하여 레이저 아트로 봉수를 재현한다면 미래의 관광자원과 봉수 왕국 전북 가야를 널리 알리는데 크게 공헌할 것으로 확신한다.

 

 곽장근<군산대 역사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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