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의 정치
팬덤의 정치
  • 나영주
  • 승인 2020.03.3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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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프로야구 해태타이거즈와 롯데자이언츠의 플레이오프 경기로 기억한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버지와 TV로 경기를 시청했다. 당시 호남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 아버지는 해태타이거즈 팬이었다. 나도 해태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이었다. 당시 경기는 5차전까지 가는 접전이었다. 롯데의 분투와 선발투수 안경잡이 염종석의 투구가 초등학생의 눈에는 멋져 보였나 보다. 5차전 해태의 마지막 타자를 병살로 처리하는 염종석의 투구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임마. 해태팬이 왜 롯데를 응원하냐” 심기가 불편해진 아버지는 내게 한마디 하고는 거실로 나가 담배를 피우셨다.

 어린 시절 나는 할아버지와 한 달에 한 번 동네 이발소를 찾아 이발했다. 소나기가 그친 뒤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졸음이 오던 여름날 오후였다. 성인 의자에 놓여진 나무판 위에 앉아 귓가에 들리는 사각거리는 가위소리에 졸음을 참고 있는 찰라, <선데이 서울>이 놓여진 길다란 의자 좌우로 앉아 있던 아저씨들의 언성에 잠이 깼다. “그래도 와이에스가 정치는 잘하고 있당께” “뭔 소리야. 디제이가 됐으면 더 잘했겄지. 영국에서 돌아와서 다음번엔 꼭 대통령 될 것이여” 10살 아이의 귓가엔 사람 이름이 아닌 ‘와이에스’, ‘디제이’라는 로봇 장난감 이름 같은 말들만 맴돌았다.

 대학 입학 후 전공인 정치학 첫 강의를 들을 때다. 교수가 물었다. 정치란 무엇인가. 여러 답변이 나왔다. 어떤 학생은 경제와 안보, 신의를 말한 공자를 인용하기도 하고, 다른 학생은 정치인들의 이전투구 행위라 답했다. 교수는 칠판에 다음과 같이 썼다.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 그 아래엔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가지는지의 문제(Who gets what, when and how)’라고 덧붙였다. 무언가 신박(?)한 답변을 기대한 나는 다소 실망했다. 그리고 교과서를 펼쳐 데이비드 이스턴과 해럴드 라스웰에 밑줄을 쳤다.

 코로나 19 정국에서 4. 15. 국회의원 선거는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슬슬 언론에는 어느 지역에선 누가 1위이고 어떤 당의 비례대표 순번이 어떤지 하는 이른바 ‘경마식 보도’가 이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당의 후보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환호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절망하기도 한다. 국회의원 총선거가 프로야구의 ‘페넌트레이스’라면, 대통령 선거는 ‘한국시리즈’ 급이다. 저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의 당선 결과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 지난해 나라를 갈라놓은 ‘조국 사태’ 이후 진영논리를 기반으로 한 ‘팬심(Fan 心)’은 더욱 격렬해 졌다. 보수와 진보는, 87년 직선제 쟁취 이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팽팽한 세를 보인다.

서로는 각자의 구미에 맞는 유투브 방송을 보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하여 글을 올리며, 정치 ‘선수’들과 ‘페친’을 맺고 ‘좋아요’ 버튼을 누른다. 지난 대선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했던 나는 우리 팀의 프랜차이즈 선수 문재인의 국정지지도 수치에 그날 하루 기분이 오락가락한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이스턴이나 라스웰의 로고스적 정의보다, 파토스적 격정으로 넘실댄다.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은 우리 정치가 마치 로마 시대 콜로세움 극장의 쟁투와 같다고 말했다. 우리 편에 대한 지독한 호의, 상대편엔 더 지독한 증오가 폭발하는 전장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어떻게 배분하여 공화국의 국민으로서 서로 신뢰할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염종석의 멋진 슬라이더도 롯데 유니폼에 가려졌듯 혹은 시골 촌부들의 이발소 정치에 등장하는 와이에스·디제이에 대한 말들처럼, 한국정치는 게임이 되어 버렸다.

 나영주<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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