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거부할 권리
선거를 거부할 권리
  • 이흥래
  • 승인 2020.03.29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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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총선거가 십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전 세계적으로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지만, 국내에선 그 기세가 조금은 수그러들었고, 며칠 전엔 후보자 등록도 마감돼 다들 선거날만 기다리고 있다. 사실 지난달쯤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칠 때만 해도 선거를 연기해야 하느냐, 마느냐는 얘기가 나돌았지만, 6.25 전쟁 중에도 선거를 치렀다는 용감한 한 마디에 연기론은 쑥 들어가고 말았다. 이렇게 선거가 코앞에 닥쳤지만, 이 나라의 선거판을 들여다보면 엉터리도 이런 엉터리가 없을 정도이다. 한국은 지금 세계에서 말 마디깨나 한다는 G20에 속하는, 비교적 선진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명색이 그런데도 매번 선거법이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고, 국민은 선거과정을 제대로 알 수 없어 늘 혼란이 지속하고 있다. 또 국민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정당과 후보들이 난립하고 있고, 정치 지도자들과 이들이 속한 정당은 법을 지킬 의사도, 도덕성도 형편없는 그래서 총체적으로 이상한 나라의 웃기는 선거판이 되어버렸다. 이러고도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을지 점잖은 사람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첫째 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선거와 관련된 법은 많아도 너무 많을 정도이다. 하지만 선거관련 법들이 공정한 경쟁을 유도해 정치를 풀어내야 하기보다는 규제하는 방향으로 많이 작동하다 보니, 선거판이면서도 정작 선거를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형국이 되어버렸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서도 선거법 개정이나 선거구 획정 등 기본적인 사항이 매번 지켜지지 않고 있다보니 선거판 자체가 처음부터 헝클어지는 양상이다. 더구나 과열을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연설회 등도 심하게 규제하다보니 도대체 누가 똑똑한지 가릴 수도 없는 선거가 돼 버렸다. 또 유권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규제하다보니 후보들의 인품과 됨됨이를 따지기는 애초부터 역부족인 상황이다. 물론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영향으로 사회적 격리를 강조하다 보니 더 그렇기는 하지만 원래부터 이쪽 판은 정치를 견인할 만한 기본 제도가 아예 막혀 있는 셈이다.

 둘째 정치의 기본 수단은 말이어야 하는데 말이 없는 선거전이 되고 있다. 올해는 바이러스 때문에 특수한 사례라고는 하지만, 정당의 힘이 압도하다 보니 후보자들은 정당에 얹혀서 실려가는 형국이다. 사실 정당들의 힘이 엇비슷한 경우에는 합동 연설회라든가 후보자 토론회 등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물의 우열도가 당락의 관건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당 경쟁력 1,2위를 다투는 대형 정당들도 어느 지역에선 후보자도 내지 못하는, 극심한 정당 편애현상이 지배하는 지금의 정치행태가 과연 제대로 된 나라일까. 그러다 보니 인물의 경쟁력보다는 금력과 줄서기가 판을 치는 그런 선거가 되고 있다. 옛날 얘기를 하자면 고리타분하다고 핀잔을 할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합동유세회장에서 토해내는 정치인들의 사자후를 기억하고 있다. 모름지기 정치인이라면 수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주고 자신의 정치신념이나 가치관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연설회도 없고 후보자 토론회마저 기계적인 형평성에 맞춰 진행되다 보니 인물의 우열을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선거판이 이번에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며칠전 우리지역의 불운한 정치인으로 손꼽혀온 임광순 선생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국회의원 뱃지 한번 달아보지 못했지만 그의 유세장엔 늘 수많은 청중들이 넘쳤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의 거칠 것 없던 사자후에 힘입어 김대중, 이철승 등 호남의 대표적인 정치인들이 이 나라의 정치판을 휘저었던 것이다. 정치에서 말이란 그렇게 중요한데 정작 말도 못하는, 그래서 정당에 묻어가는 정치인들이 너무 넘쳐나고 있다.

 정치판의 도덕성도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도대체 위성정당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루살이 정당들은 많이 보았지만 살다살다보니 위성정당이란 해괴망측한 정당들이 정치판의 주요 변수가 되어버렸다. 우리나라가 어디 비교할 데가 없어서 불가리아식 위성정당을 수입해야 할 지경인가.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이 공정한 득표에 따른 참정권 행사가 가능하도록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합의했건만 제1당 탈환에만 눈이 먼 야당이 이를 파기해 버리면서 웃기는 선거의 단초가 되버렸다. 급기야 과반수 이상의 당선을 지키려는 여당마저도 불안했던 나머지 위성정당을 만들었으니 참 가관이 따로 없는 선거전이 벌어지고 있다. 또 공천과정을 보자. 지역구 공천자는 물론이고 비례대표 후보자들은 도대체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이 사람들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을 정치인으로서의 능력과 소양을 제대로 지녔는가.

 학교와 언론인 생활을 통해 비교적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맺어왔지만, 요즘 정당명이 하도 바뀌다 보니, 이 나라 유력정당 다섯 개의 이름도 제대로 적어내지 못할 것 같다. 아무리 정치가 조석변이라고 하지만 유력정당의 정강정책이 사람만 바뀌면 매번 달라지고, 당명까지도 덩달아 달라지니 예측가능한 정치변화를 어찌 국민이 판단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듣지도 보도못한 정당들이 판을 쳐대니 해외에서는 이 나라 정당명을 한 개라도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에게 선거를 거부할 권리를 달라. 이 엉터리 선거의 굴레에서 국민이 벗어나야 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이흥래<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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