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에 대한 독립군의 원한 - 항일투사 신헌 집안의 이야기
밀정에 대한 독립군의 원한 - 항일투사 신헌 집안의 이야기
  • 신진탁
  • 승인 2020.03.26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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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특집)

 1920년 부안 신씨 선산에 시향제를 모시는 자리였다. “우리종씨 중에 줄포리에 기문, 강서리에 병열, 장동리에 택승, 덕촌에 명석, 장동리에 지승, 노길리에 요석, 이들은 100원 이상 희사하고 조선신사대종보에 기재 되었다.² 누구의 입인가도 모르게 “일진회 형세를 해야 면서기라도 하는 세상이야.”한다. 그 시절 눈깔사탕 1개에 일전하고 100전이 1원이었으며 50전은 은화였으니 얼마나 큰 액수였나!

 호롱불이 전등에 밀리고, 역참 말들이 자동차에 밀려 폐쇄되고, 짚신이 고무신에 밀려 나는 세파 속에 겨울 섣달 눈보라까지 치는 캄캄한 밤이었다. 부안 행안면 역리272번지, 홍근 집에 신헌³ 어르신이 찾아 오셨다.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집 중인데, 고충이 많네.” 하시며 “돈 있는 종친들은 모두 일진회로 갔어” 눈엔 눈물까지 흘리시며 “조카의 도움이 꼭 필요해서 찾아 왔네” 차 한 모금 마신 후 신헌 어르신은 “내가 꿈꾸며 맹세 했던 것은 잃은 나라 찾겠다는 것일세, 투사들은 타국 땅에서 고생들 하는데…….” 잠시 한숨을 쉬면서 “우린 손이 모자라니 나와 같이 군자금도 모집하고, 중국 상해도 같이 갔으면 해서 이렇게 찾아 왔네.” 아무 말이 없자 다시 “자네가 꼭 필요해 도와주게나.” 하신다.

 홍근은 할 수 없이 “수고 하십니다. 어르신 모시고 중국은 못가지만 군자금은 많은 돈은 못해도 저희가 처와 결혼 기념인 금반지와 은 쌍가락지 그리고 집안 소장품인 청옥노리개를 내놓겠습니다.” 하니 “같이 못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홍근은 “소인의 부친이 장기간 중풍을 맞아 불구의 몸이신데 어찌 불효를 합니까!” 엎드려 사정을 했다.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처인 정순은 아끼고 아낀 옥비녀와 삯 바르질 해 아들 병섭이의 결혼 자금으로 모아온 꼬깃꼬깃한 돈을 전대에서 세어 35원 60전 전부를 내 놓았다. 그리고 “어르신 건강에 유념하십시오.” 절까지 하며 애원 했다.

 보름이 지나고 밀정에 의해 말 탄 헌병대와 칼 찬 일경에 끌리어갔다. 가슴팍 속살이 불인두에 타고, 손톱과 발톱이 돌아 빠지던 그 날! 기절을 몇 번 하면서도 독립군의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고문에 못 이겨 군자금 모아둔 비밀장소를 누설했다. 감나무 밑에 묻어둔 항아리 속에서 거액과 물품들, 또 많은 애국동지들의 활동상황까지 적힌 비밀수첩까지 나왔다.

  한편 신홍근은 처의 오빠가 군 조합 서기라 일경 책임자 경부에게 1,200평짜리 논문서를 주고, 기타 비용으로 816평 논문서까지 주어 없었던 일로 풀려났다. 한편 신헌 어르신은 갖은 고문을 겪고,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벌레도 울던, 내 나라 내 땅에서 찢어지는 가슴을 않고 형무소에 갔다. 그 때 31세 젊은 나이로 2년의 옥고를 치렀고 나왔지만 고질병이 되어 병고로 35세에 하나의 무궁화 꽃잎으로 운명했다.

 그 후 6년이 지났다. 1927년 무더운 여름날 학당에 찾아온 조선청년총연맹 임종한 의 권유로 농민을 위한 모임 체에 병섭은 친우 이인구와 같이 가입하고 농민운동 준비를 하던 찰라 밀정에 발각되었다. 일경은 과거 아버지의 군자금까지 합산해 『요 주의 인물』로 지명수배를 내렸다.

 친척집으로, 처갓집으로 피신생활을 하던 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관찰자 가족으로 지명 받고 부안경찰서에서 7일간이나 “병섭의 행방을 대라”는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광부로 지원했다. 때마침 함경남도 갑산광부 생활로 고생하면서 경륜으로 십장이 되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고향땅인 부안에 돌아왔다. 세상은 변하고 아주 변했다. 부안군 일진회 간판이 제일 크고 화려했다, 또 경찰서엔 헌병과 밀정이 주둔하고 그 산하에 각 지서로 심지어 자연부락까지 분포된 대원들을 밀대라 불렀다. 밀대들의 횡포와 눈길에 독립군들을 완전 소탕되고 있었다.

 밀대 김재식은 지난 날 의리와 양심은 까마득 잊고 신고를 해서 신병섭에게 또 다시 수배령이 내렸다. 그날 밤 단봇짐 하나씩 메고 백산 사촌 누나 집으로 숨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걱정 중에 같이 훈도로 운동했던 친우가 남원 군청에 이종형이 근무하는데 안전할 것 같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남원을 찾아 친우 이인구는 형내 문간방으로, 우리가족은 소리꾼 집에 전세로 들었다. 아버지는 소리꾼 집에 집사로, 어머니는 빨래를 하며 겨우 생활했다.

 어느 날 이인구가 일경에게 끌려가는 것을 요천에서 빨래하던 어머니가 보았다. 우린 또다시 밤에 아무도 모르는 군산으로 야간열차를 탔다. 군산 해망동 1000번지는 “여름엔 큰소리로 해망동 살아요, 겨울엔 죽은 듯이 모기소리보다 작은 소리로 해망동 살아요” 한다는 곳에서 아버지는 뱃일 막노동을, 어머니는 그물 손질로 생계를 연명했다. 진탁이 4살에 어머니의 일에 지장을 주어 김제 진봉 외가에서 5살 위인 삼촌과 같이 한문공부를 했다. 이때 일정부에서는 내선일체란 제목 아래 한반도 전역에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창씨개명을 한 사람 만이 배급을 주었고, 백성의 권한을 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시게미쓰로, 병섭은 형용으로 고쳐서 부청에 신고했다. 그리고 해기원 시험을 보아 교육을 받고 항해사가 되어 원양선을 탔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큰 변화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친척들은 별 변화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결혼기념 패물을 군자금으로 내놓고, 또 2016평 논문서까지 주면서 그 당시 무마한 원한에 돌덩이를 가슴에 안고 떠났다. 아버지는 밀대에 평생 쫓기고 쫓기며 살았어도, 창씨 개명한 죄로 독립유공자 소리도 못 듣고 떠났다. 그래도 신헌 어르신은 연번 286 훈격 애족장을 1990년에 받았다

신진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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