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상감청자는 소중한 인류문화유산
부안 상감청자는 소중한 인류문화유산
  • 이정희
  • 승인 2020.03.2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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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청자하면 그동안 전남 강진군과 해남군을 먼저 떠올린다. 그만큼 우리나라 도자사(陶磁史) 연구가 이들 지역에 편중됐음을 역설적으로 시사하는 대목이다. 우리 고장 부안에서 생산되었던 부안상감청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돼 크게 조명을 받지 못했었다.

 부안 유천리도요지에서 생산됐던 고려상감청자는 나선화 전 문화재청장이 이화여대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시절 연구논문을 발표해 학계에서 크게 조명받은 바 있다. 특히 2007년 전북도민일보에서 ‘부안 유천도요, 상감청자 중흥 다시 연다’란 대형 탐사보도를 통해 학계·언론계는 물론 전국적으로 부안 고려상감청자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그동안 발표된 연구자료들을 요약해보면 전남 강진군과 해남군에서 생산된 청자는 사대부에서 사용했다는 것. 반면 전북 부안군의 유천리 도요지는 궁궐에서 사용되는 상감청자와 고려를 방문한 외국사절단에게 고려를 상징하는 선물로 부안 상감청자를 전달했다. 부안 유천리 도요지는 이른바 ‘주문형 생산체제’로 운영되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부안청자는 강진청자·해남청자와 비교해 퀄리티가 매우 높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도자사(陶磁史)는 ‘4대 인류문명’과 맥을 함께 한다. ‘황하문명’은 중국 황하강 유역에서, ‘인더스문명’은 인도 인더스강 유역에서, ‘메소포타미아문명’은 지금의 이란·이라크·시리아를 아우르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하류에서, 그리고 ‘이집트문명’은 나일강 유역에서 각각 발달했다. 이들 문명발생지들은 흙과 물과 나무가 풍부하고 좋은 곳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 문명을 발달시켰다. 인간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용기(用器)도 자연스럽게 발달했다. 지금의 도자사는 그렇게 시작됐고, 현대사회까지 전래되고 있다.

 부안군 유천리 청자요지(사적 69호), 진서리 청자요지(사적 70호)가 고려상감청자 집산지로 발달한 것은 당시 흙과 물과 나무가 다른 지역과 비교해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 걸쳐 무신의 집권과 몽골의 침입 등을 겪었다. 고려의 지배 세력도 문신귀족에서 무신귀족으로 바뀌었다. 사회경제적 여건이 변함에 따라 청자에 대한 취향도 달라졌다. 기형이 과장되거나 문양이 촘촘해지는 등의 변화가 생겨났다. 14세기에 들어서는 원(元) 지배하의 권문세족과 사대부세력이 등장하여 생활용 자기의 수요가 많아졌다. 대량생산이 불가피해지면서 분청사기가 청자를 대신하게 되었다. 특히 부안은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상감청자를 주로 생산, 85여기의 가마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런 역사적 변천과정을 겪은 고려상감청자를 인류문화유산으로 계승·보존하기 위해 국내 3대 고려청자 요지인 부안군과 강진군, 해남군은 최근 ‘고려청자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공동 추진키로 손을 맞잡았다. 천년의 역사를 품은 부안 고려상감청자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부안군·강진군·해남군 등 3개 군은 1994년 문화재청 직권으로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록된 강진도요지를 ‘한국의 고려청자 요지’로 수정하고, 이후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오는 10월에는 ‘고려청자요지 세계유산 추진단’을 공동으로 구성하고, 2022년 세계유산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그러나 과제가 있다.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한 점이다. 대중성은 상품성을 전제로 한다. 현재 부안에는 청자박물관이 있다. 청자 체험프로그램 확대와 함께 ‘고려상감청자 미니어처’ 등을 개발해 부안은 물론 전북을 찾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판매한다면 관광상품성과 대중성을 함께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아무리 좋은 문화자산일지라도 흡인력을 배가시키지 않으면 말 그대로 지역문화의 틀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정희<전주대 평교 미술아카데미 교수/전주 지후아트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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