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특집> 항일투사 강종회 선생을 기리며
<광복회 특집> 항일투사 강종회 선생을 기리며
  • 박종은
  • 승인 2020.03.19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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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재맥 방장산의 정기를 받은

 걸출한 무장이여

 

 약관에 무과 급제하여

 황제의 궁을 수호하는

 참으로 든든한 경복궁위장

 강종회 장군을 회고하노라

 

 궁을 든든하게 지켰건만 어쩔 수 없었던

 백성들의 가슴마다 한으로 맺히고

 씻을 수 없는 국치와 수난의 을사늑약

 그 처참한 늑약의 체결로

 나라가 풍전등화임에 피눈물을 쏟으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고향

 

 오자마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악물며

 어떻게 하면 일본군을 퇴치할 것인가

 왜놈들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인가

 그놈들을 모조리 무찔러버릴 것인가

 수십 명의 장사와 의병들을 팔방으로 모아서

 최익현의 의병진에 들어

 애국의 정신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섰네

 

 휘하에 삼백여 명을 거느린 포장군되어

 구국의 일념으로 싸우고자 했으나

 어어 참, 대한제국군과 대치하게 되자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는 애족의 발로에

 면암이 스스로 포박되자

 의병진이 해산될 수밖에

 

 아니다, 아니다

 이대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

 

 그 길로 기삼연과 박도경의 의병진에 합류하여

 일병과 계속 싸웠으니

 그 굳건한 항일자주독립정신을 찬양하지 않으랴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를 구하고자한

 불타는 애국심의 거룩함이여

 

 강종회 선생은 전북 고창군 신림면 도림리 150 번지에서 1851년 3월 15일에 태어나서 1915년 12월 8일에 사망하였다. 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경복궁위장을 역임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듬해인 1906년 4월 면암 최익현이 무성서원에서 거의하자 김재구 등 장사 수십 명을 이끌고 이에 참가하여 고용진의 부대에 소속되었다. 1906년 6월 16일 최익현의 진이 순창 구암사를 거쳐 순창에 도착하자 그는 포군장에 임명되었으며, 채영찬과 김갑술을 수포수로 삼고 휘하에 삼백여 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군과 대치하게 되어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 며 면암이 스스로 포박되자 의병진도 자연 해산하게 되었다. 그는 이후 부하를 이끌고 기삼연과 박도경의 의병진에서 일병日兵과 계속 싸웠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대통령 표창과 1990년에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은(시인, 고창교육청 교육장 역임, 고창예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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