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곁에 눕다 - 의병장 박도경을 숭모함
의병의 곁에 눕다 - 의병장 박도경을 숭모함
  • 정군수
  • 승인 2020.03.1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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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특집)

 누가 민초의 가슴에 들불을 점화했는가

 을사늑약의 참혹함이

 강산의 초록을 병들게 하고 물빛을 앗아갔을 때

 고창 모양성에서 분연히 일어선 박도경 의병장이여

 

 “장부로 태어났다가 방안에서 죽는다면 어찌 그 위인을 말하랴,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

 목숨을 조국에 맡긴 엄숙한 함성이 의로운 들불로 치솟았다

 

 민초들은 들불을 따라 달리고 강물은 제 갈 길을 찾았다

 무장, 법성포, 장성, 영광, 광주, 담양, 순창……

 천자포를 등에 지고 의병을 지휘하던 포사대장이여

 

 등뼈는 쑤시는 아픔보다 왜적을 겨눈 당당한 포구가 있어

 당신의 몸은 벌건 무쇠를 담금질하는 대장장이였으리

 선봉장 이도운, 중군장 손도연, 도십장 구연역, 포장 김일문

 그들이 누구던가, 들불을 몰고 찾아온 민초들이 아닌가

 

 늙은 부모 모시고 가솔을 거느린 농사꾼이여

 풍전등화의 국운을 어찌 사대부들에게만 맡긴단 말인가

 죽음을 눈빛으로 마주친 사람들이여

 

 정의를 향해 달려온 들불이 하늘에 닿기 전에 운명이 다 했는가

 남포, 부안 상서에서 왜적 기병대 말발굽에 사정없이 짓밟히고

 낭떠러지 포위망에 갇혀 가시덤불 죽음의 계곡을 헤맬 때

 “내가 여기 있으니 마음대로 잡아가라”

 

 박도경 의병장의 목소리가 개암사 울금바위를 쩌렁쩌렁 울리고

 동진강 물소리를 뒤집어 놓으니 왜적은 숨을 죽였다

 

 광주교도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 받고

 옥중에서 차디찬 칼날로 살을 에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왜적을 꾸짖는 의연함이 도도한 물길 같았으니

 당신은 결기 있는 죽음을 앞당겼도다

 

 1910년 2월 8일

 “내 어찌 왜놈의 손에 죽으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니

 그의 의로운 죽음은 우리 산야에 들꽃으로 피었다

 

 박도경 의병장이여, 우리에게 눈빛을 남긴 사람이여

 민초의 이름으로 태어나 거룩한 호명으로 당신은 누웠다

 구중궁궐 권세보다 명예보다 자랑스러운 들꽃의 화신이여

 

 나도 타다만 들불 곁에 누워 당신이 남겨놓은 들꽃을 본다.

 

 정군수(시인, 전북문학관장 역임, 석정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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