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선운사 동백보다 더 붉은 단심으로 일제에 맞서
고창-선운사 동백보다 더 붉은 단심으로 일제에 맞서
  • 진동규
  • 승인 2020.03.19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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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특집) 13.

 고창은 물빛처럼 깊고 산빛처럼 높은 듯한 곳이다.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보석이 묻어나올 듯한 곳이다. 동북쪽은 정읍시, 동남쪽은 장성군, 남쪽은 영광군, 서쪽은 황해, 북쪽은 줄포만을 사이에 두고 부안군과 접하고 있으며 구릉지가 넓고 충적지가 좁은 게 특징이다.

 고창 하면 동백과 고인돌과 미당 서정주가 떠오른다.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리는 선운산과 해안의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어 관광 여건이 좋다. 고창은 고창읍의 도산리 지석묘를 비롯해 청동기시대 유적인 고인돌유적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집 처이다.

 모양성이라 부르는 고창읍성은 국내 유일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자연석 성곽이다. 또한 고창읍에는 석정온천이 개발되어 찾는 이가 많다. 군내 무장에는 옛 읍성의 남문과 객사가 보존되어 있고, 이런 귀한 역사적 흔적이 잘 보존된 덕에 2013년 고창군 전 지역이 생물권 보존지역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하게 되었다. 행정권 전 지역이 등재되기는 처음이다.

 

 고창은 항일운동의 터이자 독립투사의 의기가 넘치는 곳이다. 동북부에 위치한 흥덕면은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삽혈동맹으로 의병소를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한 역사적인 터이다. 독립운동은 무장 성격을 띤 적극적인 항일 운동 세력과 3·1만세운동에 앞장 선 독립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기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는 유장렬 선생이다. 그는 의병장 이석용 휘하의 부장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비밀 결사인 독립의군부에 가입하고 광복단을 조직하여 활약했다.

 또한 불굴의 독립운동가 김승옥 선생이 번쩍 떠오른다. 2·8독립선언을 주도한 백관수 선생도 있다. 박도경 선생, 서종채 선생, 이철형 선생, 고제남 선생 등은 모두 의병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분들이다. 박도경은 무장 법성포 장성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고 영광에서는 포사대장으로 활약하였다. 남포 부안 등 주로 해안에서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였으나 적에게 노출되어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민족의식의 계몽가인 김승옥 선생은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은규선, 신기업 등 동지 혈서동맹을 주도하고 고창청년회와 야학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고창지역의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오의균, 은규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관리했으며, 그 후 신간회에도 참여하는 등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호남의병의 최초의 순국지사 일광 정시해 선생은 면암 최익현의 친서를 영남지사들에게 전달하여 호응할 것을 촉구했다. 임병찬 김기술 유종구 김재귀 강종회 등과 각종 무기를 접수하고 이곳저곳으로 진군했다. 군사를 이끌고 나아보니 왜군이 아니라 전주 남원의 우리 쪽 진위대 군사들이었는데 이 접전에서 중군장의 임무를 맡은 정시해 선생은 진위대의 탄환에 맞아 어이없게 순국하고 만다.

 

 1919년 일제의 악랄한 무단통치를 전 세계에 알리고 조선 독립의지를 호소하는 ‘파리장서’에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했는데 고석진 고예진 고용진 등 3분이 모두 흥덕 지역 한 집안 출신이다. 고예진은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뒤 형제들인 고용진 고석진이 최익현과 거사할 것을 계획, 정읍의 무성서원에서 최익현이 강회를 개최하고, 호서와 호남 일대의 유생과 포수들을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자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최전구 선생도 의병으로 활동하다 대마도, 욕지도, 영종도에 유폐되었다가 풀려 나 광복단을 조직하고 의금부순찰사로 활동하였다. 신림면 가평리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과 과 독립의군부 참모장을 지낸 고석진, 의병장 고예진, 고용진 등 4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를 올리는 도동사가 있다. 낮은 돌담을 둘러 아늑하고 편안하게 모셔놓은 곳이다.

 

 전국적으로 1920년대 전반의 학생 맹휴는 고창고등보통학교가 가장 많았다. 이때의 주요 쟁점은 ‘학내 문제 해결’과 악질적인 일본인 교사들을 배척하기 위한 ‘일본인 교원 배척’ 등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학생운동이 조직화되면서 ‘식민지 교육의 철폐’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요구하였다. 수업 거부만으로도 그 시대 조선 땅에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얼마나 활활 타올랐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고창의 독립운동가는 파악된 인원이 92명 정도이다. 의병이 52명이며, 3·1운동 8명, 국내 19명, 해외 8명, 학생 2명, 기타 3명 등이다.

 진동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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