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로 보내신 당신의 마음
백지로 보내신 당신의 마음
  • 송준호
  • 승인 2020.03.1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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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2>

 캠퍼스에 철쭉꽃이 만발하던 어느 봄날이었다. 학과사무실을 통해 내 앞으로 군사우편 한 통이 배달되어 왔다. 뒤늦게 군대에 가 있는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대학 4년을 모두 다니고 나서 논산훈련소에 들어간 그 친구는 전방부대에서 소대의 말단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노는 재미에 빠져 군 입대를 미루다가 결국 동생 또래의 선임들 밑에서 하루하루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을 그 친구의 고달픈 일상을 안주 삼아 우리는 가끔 낄낄거리며 술을 마시곤 했는데, 대학시절 단짝 친구로 지냈던 나로서는 그걸 마냥 고소하게만 여길 수는 없었다.

 잔디밭 한쪽 벤치에 앉아 군사우편 겉봉 한쪽 끝을 손톱으로 뜯어낸 뒤 꺼내든 편지지에 적힌 것은, 세상에, 맨 윗줄에 볼펜으로 정성스럽게 쓴 흔적이 역력한, 이렇게 달랑 일곱 글자뿐이었다.

 ‘보고 싶다, 내 친구…’

 그걸 보는 순간 처음에는, 이게 뭐지? 했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친구는 단지 그 일곱 글자만 쓴 게 아니었다. 그 안에는 편지지 서너 장을 빼곡하게 채우고도 흘러 넘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다양한 빛깔의 추억과, 말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지난날의 그리움과, 군 생활의 보람과 고달픔 같은 게 가득 담겨 있었던 것이다.

 연병장처럼 드넓은 편지지 모서리의 일곱 글자 사이에 찍힌 쉼표 하나와, 그 짧은 두 마디 말끝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 유독 꾹꾹 눌러 찍은 가운뎃점 세 개에서 나는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 친구의 모습이 눈앞을 자꾸 어른거려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 무렵 라디오로 가끔 듣곤 했던, 김태정이라는 가수가 진양조 혹은 아다지오로 애절하게 부른 노래 <백지로 보낸 편지>가 어둠을 뚫고 아련히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언제라도 생각이 생각이 나거든 그 많은 그리움을 편지로 쓰세요 사연이 너무 많아 쓸 수가 없으면 백지라도 고이 접어 보내주세요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백지로 보내신 당신의 마음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을 거예요

 

 다음날 나는 대학원 강의를 빼먹고 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갔다. 강원도 화천의 ‘사방거리’라는 시골마을에 도착하기까지 버스를 세 번씩이나 갈아타야 했고, 뙤약볕 아래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미루나무 길을 걷다 보니 무릎도 팍팍했지만, 그게 힘들다는 생각은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편지를 이 따위로 쓰는 자식이 어디 있느냐고, 그 친구를 만나면 뒤통수부터 한 대 때려줄 요량으로, 노랫말처럼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그 군사우편 한 통을 안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 멀고 낯선 곳까지 찾아가기는 했던 것인데….

 군사우편 겉봉에 적힌 주소대로 찾아간 부대 위병소에서 나는 그만 허무하게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대대 기동훈련 중이어서 사흘 후에나 면회가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어둠침침한 여인숙 방에서 혼자 새우깡에 소주잔을 비우다 말고 나는 안주머니에서 친구의 군사우편을 다시 꺼냈다. ‘보고 싶다, 내 친구…’ 말고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편지지의 드넓은 여백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나는 이윽고 방바닥에 엎드려 그 자리에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나! 도!’

 그 편지지를 접어서 도로 넣은 군사우편 봉투를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든 나는 다음날 새벽에 위병소로 다시 찾아가 그 편지를 내 친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첫 버스를 타고 그곳을 떠나는데, 마음이 참 이상했다. 결국 헛걸음을 하고 말았다는, 어젯밤의 그 아쉬움과 허탈함 같은 게 말끔히 가셔진 듯했던 것이다. 내가 마치 어제 그 친구를 만나 밤이 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수없이 많은 얘기를 함께 나눈 것 같은, 왠지 그런 장면이 길가의 미루나무들처럼 눈앞을 연속해서 스쳐가는 것이었다.

 글 = 송준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송준호

 전북 진안 출생.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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