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4)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4)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30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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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衣從軍중 조선수군 대패소식 들어
명량대첩도 / 이순신 기록화 / 한산 충무사 제공

  벽파진(碧波津)에 진을 친 이순신은 그로부터 보름 뒤 조선의 남해안을 돌아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 수군 133척을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나가 이곳 좁은 해협으로 유인, 전멸시킴으로써 세계 해전사상 그 유례를 찾을수가 없는 신화적인 전승을 거두었다.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을 기적같이 재건함과 아울러 1차전쟁에 이어 일본군의 수륙병진을 또다시 좌절시킴으로써 전라도를 휩쓸고 직산 충주까지 쳐 올라간 일본 육군을 다시한번 부산으로 황급히 철퇴케했다.

 이른바 명량(鳴粱:울돌목)해전이었다.

 그러나 명량해전은 결코 기적도 우연의 승리도 아니었다.

 한민족 사상 일찍이 없었던 이 미증유의 일대 국난을 구하고자 마치 하늘이 미리 보내주었던게 아닌가 싶을만큼 천재적인 군략가였고 오직 나라위한 일념에만 불탔던 이순신이 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전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발령되기 전에 조정은 그를 진도(珍島)군수로 발령했었다. 곧 취소되어 가이포(加里浦)첨사로 발령했다가 다시 취소되어 전라좌수사로 발령되었는데 그때 진도군수로 부임하는 도중 취소통보를 받고 돌아갔다는 설과 정읍에서 출발도 하기전에 취소되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전자의 설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珍島군수로 부임키 위해 鳴梁을 건너면서 이 천험의 요새를 보았다가 2차전쟁 전해 1596년 윤 8월에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전라도 일대를 순시하는 기회에 여기서 3일을 묵으며 일대의 지형고 조류 등을 상세히 살폈다.

 아무리 그가 탁월한 예지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조선 수군이 전멸하고 살아남아 12척의 전선으로 여기에 와서 결사전을 펴리라고 까지는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이 천험의 지형을 보자 본능적으로 그 군사적 가치를 직감하고 조사를 해 두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명량이야말로 병법으로 말하는 일부당경족구천부(一夫當逕足懼千夫:한사람이 좁은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사람을 두렵게 한다)의 천험의 요새였다.

 그가 조선수군이 전멸한 것을 안것은 패전 이틀 뒤 7월18일. 도원수 권율(權慄)의 사령부가 있던 초계(草溪)의 한 병영에서 였다.

 밀림을 잃은 호랑이와 같은 이 고독한 영웅이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백의종군 이후 처음으로 권율이 그를 찾아와 수군의 앞날을 걱정했다. 순신이 현지를 살펴본뒤 대책을 마련키로 하고 통제사때 휘하 장수들이었던 송대립(宋大立) 등 군관 9명을 거느리고 이날 하오 말에 올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적진을 뚫으며 4일만에 조선수군 전함 12척이 있는 노량진(露粱津: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으로 달려갔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심한 전쟁공포증에 걸려 있었고 장병들의 사기는 말할것도 없었으며 병력도 필요인원 2천여명의 절반인 1천여명에 불과했다. 군량이 모자라 굶주리고 있었으며 전함에 함포는 장착되어 있는데 화약과 포탄은 물론 활과 화살도 없었다.

 패잔병의 모습 그대로였다.

 돌아와 권율에 실태와 대책을 보고하고 권율의 명에 의해 진주(晋州) 정개산성(鼎蓋山城)으로 가 26일부터 3일간 성의 방비를 점검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말과 활과 화살도 없는 군사들이었다.

 여기서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장을 받은 이순신은 곧바로 노량진으로 가 배를 타지 않고 전선 12척을 서쪽으로 나가 회령포에 대기케 한 뒤 자신은 일단의 군관들을 거느리고 섬진강을 따라 구례, 곡성, 옥과 등을 돌아 순천으로 남하하여 보성(寶城)을 거쳐 보름만에 회령포에 이르러 대기하고 있던 수군 전선에 올랐다.

 이순신은 그의 통제사 복귀를 알고 뒤를 쫒는 일본군의 위협을 하루 거리로 따돌리며 가는 곳마다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모았으며 관가의 창고를 열어 화포와 화약, 활과 화살 등 무기를 거두어 회령포에 대기중인 전선 12척에 보내 재무장 시키고 병력도 재편성했다.

 그가 회령포에 도착했을 때 전선들은 모두 정원 190명에 가까운 병력이 편성되었고, 호력도 어느정도 갖추어 졌으며 군량도 우선은 넉넉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8월26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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