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고추장보다도 매운 의지로 다진 순창의 의병정신
순창-고추장보다도 매운 의지로 다진 순창의 의병정신
  • 정재영
  • 승인 2020.03.12 14: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복회 특집 원본)12.

 장수의 고장이요, 고추장을 비롯한 장류의 고장인 순창은, 강천산 회문산 섬진강이 살아 숨 쉬고 예와 의를 소중히 하며 문화유산이 빛나는 곳이다.

 순창은 일찍이 을사늑약으로 이 겨레가 얽매일 때 의병의 함성이 드높았던 곳이다. 병오년의 호남의병은 을사 이후 한말 2기 의병의 주맥이다. 최익현 선생의 태인 무성서원에서 시작된 의기가 순창 정읍 곡성 등 호남 벌을 누볐다. 그때 모인 의병이 800명으로 토적 결전에 임했으니 그 현장이 바로 순창이었다.

 호남벌에 밀어닥친 적은 왜적이 아닌 진위대였다. 간교한 왜적이 우리 동포를 현혹 제물로 앞세웠다. 토족이전에 동족상잔의 피를 흘려야 하는 숨 막히는 순간 의병대장 최익현은 일체의 발포를 중지 시키고 동포의 애국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총 뿌리를 왜적에게 돌리고 함께 싸우자 하였다. 우리 의병에게는 이처럼 의와 더불어 더 큰 인이 넘쳤다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무자비한 발포로 응답하였으니 젊은 의사 정시해가 즉석에서 순사하고 진중은 아수라장이었다. 후일을 기하여 모든 의병은 해산하라는 명령에도 끝내 그 자리에 남아서 결사 항거한 의사는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유종규 조우식 조영선 최재학 라기덕 이용길 유해용 양재해 등 열 세분 이었다.

 최익현과 13인의 의사들이 잡혔던 역사의 현장이다. 최익현은 대마도로 끌려가 고문 끝에 죽게 되었고, 대마도 끝자락에 이즈하라에는 백제의 한 비구니가 창건한 수선사라는 절에 최익현 의병장의 순국비가 있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로 유배되었던 임병찬은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은거하면서 재차 의거를 도모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이후 1912년 5월 일경에 체포된 뒤 옥중에서 분개해 3차례 자살기도를 하였고 거문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년 5월 23일 유배지에서 사망 순국하였다. 고인의 무덤은 현재 순창 회문산 정상 부근에 있다.

 김동식은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8월 1일을 기하여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이러한 일제의 내정 간섭에 대하여 통분을 금치 못하고 9월에 거의하였다. 이때 임실에서 일어나 의병장이 된 이석용과 녹천 고광순의 의진 등과 합진하여 효과적인 의병운동을 모색하였다. 1907년 9월 19일 순창 우체국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고 10월에 지리산 일대에서 고광순의진과 함께 진주 일군 수비대 파견대와 접전하였다.

 10월 22일에는 이석용 의진과 함께 1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심원암 부근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일본군 수비대 10여 개 소를 습격하여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으며 일진회 회원 및 친일파 주구배들을 숙청하는 등 항일전에 주력하였다. 활동지역은 대체로 순창 임실 진안 및 용담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말 의병활동은 나라를 침략하려는 일제에 맞선 움직임으로 특히 전라도 의병들이 큰 활약을 펼쳤는데 순창에서는 신보현 양윤숙 의병대가 유명하다. 신보현은 1868년 순창에서 태어나 1908년 5월부터 1909년 12월까지 순창 고부 등 전라남북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신보현은 50~100명 정도의 의병을 거느리고 활동한 의병장이었다. 신보현의진은 독자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성화의진과 합세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전북 순창군 복흥면 일대에서 40~50명으로 편성된 의병부대로 활동하였는데 동년 11월 26일 순창군 하치등면 내동에서는 약 200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순창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 때 신보현의진은 이진사와 정해석 등의 의병장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약 150명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1909년 순창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보현의진은 동년 4월 5일 이성화의진과 합세하여 순창군 가포곡 일대, 5월 1일 태인군 인곡면, 5월 19일 고부군 벌말면, 6월 7일 고부군 서부면, 6월 20일 고부군 우덕면 등지에서 일본 군경으로 구성된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1909년 11월 이후 신보현은 정읍 순창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신보현은 일본 군경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1909년 12월 23일 정읍군 동면 석계촌에서 체포되었다. 신보현의 가계 성장 재판기록 등은 알려진 것이 없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양윤숙은 양춘영이라고도 한다.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국화리 출신이다. 1906년 면암 최익현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참가하였으나 남원 전투에서 최익현이 체포되어 실패하자 은신하였다. 1907년 정미 의병이 일어나자 이듬해 양윤숙은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의 뒷산인 회문산에서 의병을 조직하였는데 총인원 1천 2백여 명에 화승총 270정과 칼 30자루로 무장하였다.

 양윤숙은 향리인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계속하였으며 1909년 12월 3일경에 김제수비대에 체포되었다. 체포당시의 경찰조서에 따르면 부하 의병에 대해서는 일제 함구하였고 국가를 위해 죽을 따름이라고 소신을 밝혔으나 일제는 이를 왜곡 기록했다. 죄목이 내란죄와 방화죄를 추가하여 교수형을 내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가인 김병로는 초대 대법원장이었다. 항일투쟁부터 해방 후까지 민족주의적 법률가로 굵직한 삶을 살아 ‘법의 거인’이라고 했다.

 변호사 시절 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23년 허헌 김용무 김태영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다.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했다.

 광복이 되면서 잠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 70세로 정년퇴임하였다.

 6·25전쟁 때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이었으며, 세태의 변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곧은 절개는 후인들에게 깊은 감명과 교훈을 주고 있다.

 가인은 “법관은 굶는 한이 있더라도 정의만은 수호해야 한다”는 가인은 ‘계구신독’(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동을 삼간다)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지금 법관들에게도 나침반 같은 구절입니다.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김일두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7년 원주민긍호의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가산을 정리하여 태화상회로부터 400여 개의 폭탄을 구입하여 경찰서 등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시교원 참교를 역임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대한유생독립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신원으로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6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80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 밖에도 김선여 양경학 이황룡 정기선 진치언 최산홍의병장들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 영광정과 7인의 의사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자 당시 순창에 살고 있던 금옹 김원중은 뜻 있는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물자를 준비하여 광인 행세를 하며 은밀히 항일 투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21년 6월 27일 항일 운동의 집회 장소였던 자리에 8명의 애국 동지의 뜻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정자를 세우고, 처마 끝에 태극 팔괘를 새겨 망국의 설움을 되새기며 정자의 이름을 영광정이라 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때 순창군 쌍치면 관내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잿더미만 남았는데 영광정만 유일하게 남았다. 다만 영광정 안에 있던 27개의 현판들만 없어졌다고 한다. 영광정은 오랜 세월 추령천의 모진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도괴 직전에 있던 것을 1974년 순창군의 유림들이 보수하였는데 1991년 담양~정읍 간 도로 확장 공사 때 건물이 입을 피해를 막기 위해 해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한편 순창 회문산은 한말 일제 침략에 항거하던 최익현 임병찬 양윤숙 의병대장의 활동 무대였다. 의병은 우리 민족정신의 고귀한 지평이었고 민간인으로 나라를 지키고자한 의로운 분들이었다. 순창은 일찍이 의병의 함성이 뜨거웠던 곳이다. 의군 팔백 중 생사를 초월한 의사만도 열세 분이다. 팔백 의군의 함성에는 호남의 기개가 엉겼다. 우리의 후손들이 고추장보다도 매운 의지로 다진 순창 의병 정신을 본 받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정재영(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