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면 용정리 이회열 선생의 용기를 기리며
오수면 용정리 이회열 선생의 용기를 기리며
  • 김학
  • 승인 2020.03.05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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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8·15 광복 74주년이 되는 해다.

 맨주먹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그날의 함성이 삼천리금수강산을 뒤흔들었던 것은 1919년 3월 1일부터였다. 나는 그때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도 없었다. 그것이 늘 안타까웠다. 그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대신 요즘엔 일본상품 사지 않고, 일본여행 가지 말자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독립투사들의 애국심을 본받으려 노력하고 있다.

 나는 임실군 삼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때는 삼계에 중학교가 없어서 오수중학교까지 8km를 걸어서 다녔다. 버스도 다니지 않던 시기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오수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고, 오수가 3·1독립만세운동 전국 10대 의거지로 선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배웠다. 그래서 오수가 자랑스러운 고장임을 알게 되었다.

 오수 3·1독립만세운동은 유교,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 모든 종교인과 교육자, 학생, 민중들이 함께 일치단결하여 일으킨 항일투쟁이었다.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촉발된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질 때, 오수공립보통학교(현 오수초등학교) 이광수 선생이 1919년 3월 10일 이 학교 3,4학년생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수 장날인 3월 23일부터 이틀 동안 오수 장터에서 면민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때는 이기송, 오병용, 이회열 등이 앞장서서 그 시위를 진두지휘했었다.

 독립유공자 이회열 선생은 1872년 2월 9일 오수면 용정리에서 태어나셨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순박한 분이 어떻게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는지, 그 용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고, 의협심이 강한 젊은이였다. 53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그의 기개는 변함이 없었다. 이회열은 무슨 일이나 옳은 일에는 앞장설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일화가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아쉽기 짝이 없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2시, 오수장터에서 8백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하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를 비롯한 순사들이 출동하여 주동자인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끌어갔다고 한다. 그러자 오병룡, 이병렬, 김일봉, 이회열 등 8백여 명이 주재소로 몰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요구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겁에 질린 일본순사가 이기송을 풀어주었다. 2천여 명으로 불어난 오수 시위대는 장터로 돌아가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달려가 만세를 외쳤다. 이들 시위대는 다시 주재소로 쫓아가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 등 구금된 애국자들을 풀어주었다. 이때 순사보 고택기가 시위대에게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시위대는 그의 총을 빼앗고 그로 하여금 오히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했다고 한다. 오수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남원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출동한 일본군 지원부대가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그 때 붙잡힌 시위대는 대구복심법원 재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혐의로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회열 선생도 그때 검거되어 징역살이를 했을 것이다.

 조그만 시골장터에서 촉발된 오수만세운동은 일본의 무단통지를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3·1독립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거나 감옥에서 순국하여 국가유공자로 추서된 임실 사람은 모두 76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1919년 3월 23일 오수만세운동과 관련된 독립운동유공자는 44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훗날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 오수3·1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오수 3·1동산에는 3·1독립운동기념탑을 세웠다.

 지금도 오수에 가면 오수리 산 3번지에 있는 3·1독립운동기념탑을 찾곤 한다. 그 탑을 보면서 100년 전의 오수3·1독립만세운동을 상상해 보는 것도 흐뭇한 일이다. 우리 선조들의 애국애족정신을 회상해 보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이다음엔 이회열 선생의 고향인 용정리까지 찾아가서 그분의 흔적을 더 살펴보고 싶다. 삼가 이회열 선생의 명복을 빈다.

김학(수필가,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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