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특집> 임실 애국선열들의 항일운동이 전국에서 으뜸인 호국의 성지 임실
<광복회특집> 임실 애국선열들의 항일운동이 전국에서 으뜸인 호국의 성지 임실
  • 김추리
  • 승인 2020.03.0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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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노령산맥의 동쪽 산간지대 임실, 전주에서 국도를 따라 들어가는 임실은 전라북도에서 가장 내륙에 위치해 있다. 동쪽은 진안, 장수, 서쪽으론 정읍, 남쪽으론 남원, 순창이 있고 북쪽으론 완주군과 접한다. 무진장과 더불어 산간오지로 통한다. 하지만 임실은 숨어 있는 볼거리가 많고 섬진강의 상류로 자연환경이 청정하며 산자수려한 고장이다.

  무엇보다 산 높고 골 깊은 임실은 어디를 가나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널리 서린 곳이다. 임실의 항일운동은 국내 어느 곳보다 줄기차고 강렬했다. 의병 54명, 3·1운동 78명, 국내 13명, 기타 1명을 합해 146명의 애국지사들로 도내 어느 지역보다 수가 많으며 장렬하였다. 가을 한 날을 잡아 그분들의 숨결을 찾아 나섰다.

  이석용 의병장과 그와 함께 의병활동을 한 28의사가 잠들어 계신 소충사, 이석용 의병장의 생가, 충절의 상징 오수의 원동산과 둔데기 마을의 이웅재 고가, 독립지도자를 길러낸 김영원 선생의 삼요정, 민족대표 박준승 선생 기념공원, 한영태 열사의 묘소 등을 찾아다니는 길은 멀고도 외졌다. 굽이굽이 고라실을 돌고 돌아야 했다.

  백여 년 전, 탈 것도 없던 그 시대에, 외진 산골을 걸어 다녔을 그분들. 더구나 일경과 주변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하던 그분들을 생각할수록 알아갈수록 가슴이 뻐근해지곤 했다. 그나마 얼마 남아있지 않은 자취에 아쉬움도 컸다. 그 가운데 몇 군데를 소개하련다.

 

 

 □ 별들의 영원함으로 빛나는 소충사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산 130-1

 항일 의병장 이석용 장군과 28명 의사를 배향하는 소충사昭忠祠

 

 소충사를 향해 가는 시월상달의 이른 아침

 억새가 하늘거리고 쑥부쟁이도 한창 고울 때인데

 짙은 안개가 앞을 막고 길을 터주지 않는다

 더듬더듬 달려 성수산 골짜기 소충사 앞에 이르니

 등이 곡괭이처럼 굽은 노인이 가을걷이 끝난 고춧대를

 무더기무더기 모아놓고 불을 놓는다

 매움한 연기가 골짜기를 에워싸 알싸하니 눈물이 흐른다

 높이 솟은 연기가 독립 운동가들의 함성인 양

 우우우~ 골짜기를 벗어나 길을 따라 퍼져간다

 

 한 세기 전, 구한말

 그 시대 우리나라는 이보다 몇 배나 더 암울했으리

 밤길인 듯 깜깜한 나라의 미래를 밝히고자

 이 아득한 골짜기를 짚신발로 누볐을

 항일독립운동의 의병들

 

 홍살문을 지나 스물아홉 계단을 올라

 스물아홉 기 비석이 서 있는 곳

 호남창의동맹단의 주역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

 천문비 앞에서 고개를 깊이 숙인다

 ‘북두성을 우러러 서울을 바라보고 땅을 굽어보며 대중과 맹세하노라’던

 북극성 이석용 대장의 충의와 기개와 더불어

 의롭게 전사한 28인 장졸들이 28수 별자리로 계시는 곳

 

 햇살이 나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눈부시다

 안개 걷히고 연기도 사라졌다

 대한의장 정재 이석용과 부인의 합장묘 앞에서 손을 모으고

 뒤돌아서니 멀리 고덕산 아래 삼봉리

 이석용 대장의 생가 쪽이 한눈에 들어온다

 

 총칼도 두려워하지 않은 그들이 첩첩산중에서

 의병활동을 하셨으니 정의롭다, 자랑스럽다, 왠지 자꾸만 눈물이 난다

 가을 끝난 논에 움벼가 한 뼘씩이나 자랐다

 벼 포기마다 의병들이 부르짖는 함성인 듯 날선 푸른 기운이 솟는다

 

 소충사에서 돌아오는 길

 성수초등학교 앞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 아래서 플랜카드가 외친다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라고

 임들은 갔어도 그 정신이사 아직도 임실 곳곳에 별빛으로 오롯이 살아 있다

 

 

 □ 이석용 의병장의 생가

  저수지를 지나서 오지 중의 오지 삼봉리 이석용 의병장의 생가는 고적했다. 이렇게 깊은 골에서 그렇듯 훌륭한 사람이 태어나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으니 영웅고을 이구나 싶어 저절로 경건해진다. 광대나물이 민족의 혼이라도 되는 듯 진한 색으로 피어 있다. 여기저기서 가실을 마치고 잔삭다리를 태우는 연기가 자욱하다.

 

 

 □ 3·1동산에 올라

  임실읍 이도리에 있는 3·1동산에 올랐다. 고샅에 묻힌 입구를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 그 옛날 그분들의 길은 얼마나 흐릿했을까. 그들이 바라보는 나라의 앞날은 또 얼마나 암담했으랴. 박새들이 여린 몸을 날리며 노래를 한다. 가파른 계단을 새들의 소리를 위안 삼아 오른다.

  3·1운동 기념비 앞에서 목례를 하고 영모정에 올라 주변을 둘러본다. 가을 색으로 물든 동산이 아름답다. 살기도 팍팍한 그 시대에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진 의로운 분들을 그려본다. 문득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싶다. 그날 그 분들의 함성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 나라가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까. 혼자서 만세삼창을 한다.

 

 

 □ 오수 둔덕 이씨 가문의 활약

  둔덕 이씨 가문 활약상은 1919년 고종 황제가 승하하고 국장을 할 무렵, 경성 인산 행렬에 참여했다가 경성의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한 이기송 지사 등 둔덕 이 씨들이 귀향 후 3월 23일 임실 오수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서로 극비리에 연락을 취해가며 거사를 준비했고 이날 오후 2시 드디어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리게 됐다. 당시 재판기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20~30여 명이 시장거리를 돌면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대열은 점점 커져 수천 명까지 불어났다.

  오수리 원동산공원에서 이기송 지사는 “우리 조선은 독립국이었는데 10여 년 전에 일본에 합병 당하였으니 2,000만 우리 국민 모두가 합심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몇 번이고 거리를 돌면서 만세를 부르고 경찰과 주재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 유리창과 문짝을 부수고 사무실 비품 등을 파괴했다. 이기송 지사 등 수십 명의 둔덕 이씨 일가는 일본인 경찰서장과 맞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하다가 끝내 체포당했다. 그럼에도 이만의와 이영의·이송의·이정의 지사 등은 체포된 이기송 지사를 석방하라고 일본 순사를 협박했고, 결국 이기송 지사는 다음날인 24일 풀려났다. 이기송 지사는 풀려나자마자 다시 군중 앞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그 열기는 더욱 높아갔다. 24일 저녁 남원 헌병대와 임실 경찰서의 무장대가 대거 출동, 서로 대치하다가 결국 발포해 사상자를 낸 뒤 해산됐다. 지금도 둔데기마을에는 민족정신이 어린 둔덕 이씨 종가(이웅재고가,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2호)가 500년 고고한 세월을 살고 있다.

 

 □ 영광스런 둔덕 이씨 일가 16명 애국지사 이름

  이기송(징역 7년·국민장), 이회열(징역 4년·애국장), 이기우(징역 3년·애족장), 이윤의(징역 3년·애족장), 이주의(징역 3년·애족장), 이용의(징역 3년·애족장), 이만의(징역 2년·애족장), 이영의(징역 1년·애족장), 이송의(징역 1년·애족장), 이정의(징역 1년·애족장), 이하의(징역 8월·대통령표창), 이태우(징역 8월·대통령표창), 이재의(징역 2년·애족장), 이강목(징역 2년 3월), 이창준(징역 8월·대통령표창), 이정우 지사(징역 4월) 등

 

 

 □ 구국의 신념을 붓으로 지켜낸 조희제 선생

  조희제 선생은 1873년 12월 10일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절골에서 태어났다.

  임실에서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재산을 털어 임실 순창 남원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을 직접 도왔고 옥고를 치르던 애국지사의 뒷바라지도 도맡았다.

  선생의 독립운동 중 가장 중요한 활동은 『염재야록』의 집필과 편찬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애국지사의 독립운동을 기록해 역사에 남겨야겠다고 결심한 선생은 수십 년간 각지를 다니며 관련 자료를 수집했으며 이후 저술 작업을 진행해 1931년 초고를 완성했다.

  책은 건·곤 두 책으로 나누어 편집하고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표지에는 ‘덕촌에서 그때그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뜻의 『덕촌수록』이라는 이름을 붙여 한 질을 마루 밑에 묻어 숨겼다.

  그러나 1938년 『염재야록』의 편찬사실이 발각되자 선생은 임실경찰서로 연행되어 고문을 당했다. 옥고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자 일제경찰이 상투를 자르라고 다그쳤다. 선생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39년 1월 자결 순국했다.

  광복 후 선생의 제자가 마루 밑에 숨겨놓은 『덕촌수록』 초고본을 편집ㆍ발간하면서 『염재야록』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염재야록』은 오늘날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박준승 선생 생가 기념공원

  ‘박준승 선생 생가 기념공원’을 찾아가면서 너무나도 외진 곳이어서 또 한 번 놀랬다. 그 당시에는 논두렁 밭두렁이었을 이 길을 헐떡거리며 다녔을 독립 운동가들의 노고가 쓰리게 다가온다.

  말끔하게 단장한 기념공원에 옥중시비동상으로 앉아계시는 박준승 선생. 당신의 뜻대로 독립을 이뤄 번듯하게 변화된 대한민국을 보면서 얼마나 감회가 새로우실까. 의연한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깊고 깊은 산골, 임실에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어선 것은 왜일까. 주치 마을에서 바라보니 의병들이 거사를 위해 수없이 오르내렸을 조항치가 눈앞이다.

 

 

 □ 독립지도자를 길러낸 삼요정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삼요정으로 향한다. 삼혁당 김영원 선생이 구국의 길을 교육하신 곳이다. 방죽 위에 옮겨 지은 집 한 채와 후손이 사는 집이 있다. 김영원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련을 공손히 읽는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노인용 물건들을 보니 아래채에 산다는 후손께서도 연세가 꽤 많은가보다.

  어찌 됐건 우리는 임들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애국애족의 민족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 아직도 분단국가에서 헤어나지 못한 우리들이 각성해야 할 과제다.

 

 산과 물이 잘 어울려 자연환경이 좋은 곳

 학문을 연마하기에 좋은 곳

 애국정신을 고취하기에 좋은 곳

 

 삼요정이 안긴 임실은 열매고을이다

 골짜기마다 열매 익듯 의병들의

 나라사랑이 알알이 익은 임실

 이 나라 최고의 독립운동을 일으킨 고을이다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감나무골에 이인이 탄생했다

 경주김씨 학림공파 김영원은 전라도서원의 색장이었다

 세 번이나 혁명을 하여 삼혁당인 김영원

 삼요정을 지어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삼았다

 

 삼요정은 깊고 깊은 산골에 있어 적적하다

 지하활동과 삼일운동을 지도하여 민족궐기를 이루고

 구국운동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사신 어른

 박준승 양한묵을 조선민족대표 33인에 참여시키고

 창동학교 삼화학교 교장으로 구국의 길을 교육한

 그 분의 뜻에 저절로 다소곳해지는 곳이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샘솟는 곳이다

 

 □ 한영태 선생의 묘소

  삼요정에 머무른 시간이 길었다. 다시 길을 나선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던 길의 끝까지 더듬더듬 달렸다. 운암면 지천리. 길이 끝난 곳부터 두 발로 헤매며 한영태 선생의 묘소를 찾았으나 허탕이었다. 맥이 풀려 산을 내려오다가 콩을 매고 계시는 연로하신 내외분을 만나 혹시나 하고 여쭈었다. 운암면 소재지로 옮겼다고. 세상에 그걸 몰랐다니.

  운암면 소재지로 달린다. 운암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곳. 우리 형제들의 탯자리다. 우리가 다닌 학교 앞에, 무심히 지나치던 거기에 운암3대운동기념비가 있었지. 달려 가보니 그곳 오른편에 한영태 열사의 비가 옮겨져 자리하고 있다.

  묘비 앞에서 부끄럽고 송구하다. 한 번도 일부러 찾아와 예를 갖추지 못한 불손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묵념을 올린다.

 

 □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개 숙이다

  일제강점기를 겪고, 6·25동란을 치르고, 우익이다 좌익이다 휘둘리며 헐뜯기며 살아낸 우리 민족이 아직도 여당이니 야당이니 쌈박질이나 하고 있으니 나라를 위해 생애를 바친 독립운동가들 뵐 낯이 서지 않는다.

  올가을 참으로 뜻 깊은 나들이를 했다. 가끔 오늘과 같이 독립 운동가들의 혼이 서린 곳을 찾아본다면 그나마 오늘처럼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새기게 될 것이다.

 

  김추리(수필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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