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특집> 김인식 장군을 추모하다
<광복회특집> 김인식 장군을 추모하다
  • 윤현순
  • 승인 2020.03.05 15: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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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동학혁명 이후 1909년 후반까지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초기에는 학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점차 농민 포수 보부상 해산된 군인 동학교도 등이 함께 하여, 항일 전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호남지역에서 최익현 임병찬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태인 의병은 항일 의병의 시작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관군인 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었고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 며 의병을 해산했다.

 이는 을사늑약 이후 호남에서 일어난 최초의 항일 의병으로 전국 의병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의병운동이 상소 투쟁에서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09년 일제의 호남의병 대학살 사건 이후 의병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1908년 임실 전투에서 패한 후 의병진을 해산한 전북 임실 출신 의병 대장 이석용이 1912년 중국을 무대로 한 의병 활동의 재개를 위하여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하였고 김인식은 그 비밀결사대에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비밀결사대원으로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병사를 모집하고 무기와 군자금 군수품 등을 보급하는 후방에서의 활동으로 임자동밀맹단 단장을 도왔다.

 

 큰 그림으로 보면 둘이 아닌 단체들

 어디를 보아도 드러나지 않는 일

 아무도 모르게 목숨 기꺼이 내 놓는 일과

 떠나고 나면 타고난 재처럼 흔적도 없는 일

 그런 일을 주저하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비밀결사대원이다

 그 속에 오늘의 주인공 김인식이 있다.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후천리 태생

 

 1912년이면 그의 나이 48세, 결코 젊은 혈기도 아니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 수밖에 없었을 국가의 명운 그리고 그늘에 숨어서 후원자로서의 살아가는 일. 조정에서도 압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금지 명령을 내린 의병 활동. 많은 희생을 낸 역사의 큰 상처로 남아 더러는 한두 명 더러는 열 명 백 명, 소규모이거나 열악한 상황에서 얻어낸 성과들은 비록 작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거룩함이었다.

 그렇다면 김인식은 어떤 인물인가? 자료를 찾아보니 없다. 면사무소에도 없고 군청에도 없었다. 그래서 임실문화원이 보완 정리한 임실항일운동사를 펼치니 거기 있었다.

 그는 이석용이 일경에 체포된 후, 날마다 나라 걱정에 밤잠을 설쳤고, 후학들의 교육에 열중하다 향리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어디를 보아도 산 좋고 물 맑은 우리나라

 집을 짓는데 대들보만 필요할까?

 잃어버린 땅을 찾는데 굽은 등, 휜 다린들 할 일이 없었을까?

 

 만주 연해주 유럽 미주 여러 나라까지 발길 닿는 곳마다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항일투쟁의 역사였다. 국내 뿐 아니라 상해로 연길로 몽골로 블라디보스톡과 하얼빈 우수리스크까지. 이준 김구 윤동주 이태준 이상설 교과서에서 배운 이름들 말고, 우리의 곁에 있는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얼마나 목숨 걸고 지켜낸 역사인가 뼛속 깊이 새겨야한다.

 

 지난 계절

 블라디보스톡과 하얼빈을 거쳐서 아픈 역사를 듣고 현장을 가보았다

 강제로 이주되어 느닷없이 허허벌판으로 내동댕이쳐진 선조들…….

 그들이 출발하여 돌아오지 못한 기차역인

 라즈돌리네 역과 카자흐스탄과 그리고 더 멀리 얼어붙은 땅까지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먹먹하고

 아픈 역사를 연결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이 땅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고

 이 땅에서는 항거할 힘도 없어서

 중국으로 러시아로 떠돌면서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는 선조들의 절박한 마음을

 답사나 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스쳐 지나는 것은 아닌가,

 그 실상을 지난 이야기쯤으로 흘려버리는 것은 아닌가?

 

 까마득히 잊혀져가는 항일정신을 또 한 번 돌이켜본다. 다시는 자주권을 잃지 말자고 우리의 항일투사들이 아니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목숨 바쳐가며 남겨주신 이 나라, 거룩한 선물을 세계만방에 빛내고 빛내야 할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 공훈이 인정되어 훈장을 받으신 분 보다, 아직도 활동한 업적을 인정받지 못한 분이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꾸준히 발굴 작업을 하고 그 업적이 인정받도록 우리 모두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한 가족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 분들의 후손이 되어 너 나 할 것 없이 자료 발굴에 힘을 보태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점 후손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는 항일투쟁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준절하신 충의 열사의 호국정신 계승하자.

 

 윤현순(시인, 시낭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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