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의 사회학
감염병의 사회학
  • 채수찬
  • 승인 2020.03.03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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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피렌체에 살던 지오반니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은 남녀간 애정 이야기가 주된 내용인데, 경제적 불평등과 계층간 얽히고설키는 사회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분사회에서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겪는 부당한 차별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사회적 약자인 여자가 사회적 강자인 남자, 특히 권력자인 성직자들을 골탕먹이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줄거리도 한 축이다.

 데카메론은 당시 창궐하던 유행병을 피해 14일간 별장에 피신한 열명의 남녀가 열흘간 백개의 이야기를 하는 구도로 설정되어 있다. 현재 확산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잠복기간이 14일이라서 감염의심자의 자가격리 기간이 14일인데,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이제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세계적인 범유행병(pandemic)이 되리라는 예측이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전쟁을 거치고 나면 사회구조에 변화가 오듯이, 범유행병(pandemic)이 휩쓸고 나면 달라지는 게 많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세계가 밀접하게 연결되는 초연결사회로 가는 현실에서 발생한 이번 감염병 사태는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우선 사람들이 이동과 접촉을 기피하게 되니, 교통은 위축되고 통신은 더 활발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술 발전도 이런 경향을 강화시킬 것이고, 제도도 이런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지역간 왕래가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는 비즈니스를 원격으로 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일하는 카이스트에서는 이번 봄학기 개강 첫 두 주일 동안은 일단 온라인으로 원격강의를 하기로 했다. 이를 준비하는 데 상당한 자원이 들어간다. 동시에 많은 양의 원격강의를 할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도 필요하고, 통신용량도 증설되어야 한다. 이를 지원하는 전문인력도 더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외부에 있는 클라우드 설비를 이용해야 해서 보안 문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감염병은 우리나라에서 인간관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관혼상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인을 직접 모르는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상주를 위로하고, 신혼부부를 직접 모르는 사람들이 결혼식에 참석하여 혼주에게 축하하는 것이 그동안 우리나라의 관행이었다. 요즘에는 감염병 때문에 아주 가까운 친척과 친구만 참석하고 있는 것 같다. 감염병 사태가 끝나고서도 이런 변화의 일정부분은 남을지 모른다.

  인류역사는 전쟁이나 범유행병 같은 재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전쟁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심 때문에 일어나지만, 감염병은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에서 온다. 지진이나 태풍과 같은 재난이 지구 순환구조의 일부인 것처럼, 범유행병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태계의 한 부분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인류의 생존이 지구상의 이런 현상들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류가 4차산업혁명 시대가 왔다고 떠들어도 기본적인 환경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한국의 4월 총선 결과나 미국의 11월 대선 결과보다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범유행병이라는 말이다.

 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미국 대학을 잠시 휴직하고 귀국해서 한국의 정책결정자들을 도운 적이 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모두 나처럼 정신없이 지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었다. 그런데 어느 봄날 길에서 연인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걷고 있는 걸 보고, 위기 속에서도 삶은 계속 되는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달았던 기억이 난다.

 삶은 계속된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오늘, 데카메론 속의 남녀간 애정행각 이야기에 빠진 사람들처럼, 우리도 ‘기생충’과 ‘사랑의 불시착’ 이야기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채수찬<경제학자/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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