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최초 군산 3.5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호남 최초 군산 3.5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 이복웅
  • 승인 2020.03.0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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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탈취한 후 식민 경영통치 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조선사회를 재편하기 위하여 강력한 무단통치를 감행하였다.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는가 하면 전통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로 한민족의 정당한 민족 저항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족적인 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국내·외에서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을 비롯하여 국내의 비밀결사 운동, 교육 문화 및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해 저항운동 역량을 강화 해 나갔다.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여 1919년 한일 합병조약 무효화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것이 3.1운동 또는 3.1만세운동인 것이다.

  조선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만주, 노령, 미주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세계 1차대전이 끝나고 개최된 파리 강화회담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안 한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독립은 희망적인 분위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독립운동가 김규식은 1918년 파리 강화회담에 독립의 목소리를 알려야 한다는 발언과 1919년 고종황제의 갑자스런 죽음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고종을 독살했다는 말이 확산하면서 온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면서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1일 오후 3시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중 29명이 태화관(서울 인사동 소재)에 모여 역사적인 조선의 자주독립 선언문을 낭독했으며 그 시간 탑골공원에서도 경신학교 학생인 정재용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거사 시간을 약속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1,000여명이 넘었고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때 성안과 각 지방에서도 수십만 군중이 함께 참여하였다. 3.1만세운동은 독립 선언을 기점으로 탑골공원에 이어 3월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전국에서 모인 군중만도 무려 50만이 넘었다.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만세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46만3,086명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조선의 전체인구 36%에 달하는 군중이었다 만세 시위는 천안의 아우네를 시작으로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으며 일본과 연해주 까지 이어져 1년 동안 계속 일어났다. 임종구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60일 동안 1,224회의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이를 보면 <천안 아우네 만세운동> <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 <만주 용정 만세운동>, <군산 3.5만세운동>, <익산 이리 장날 만세운동> 등 수많은 만세 시위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3월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한강 이남과 호남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군산의 3.5만세운동은 군산영명학교를 졸업한 김병수가 1919년 2월28일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세브란스 병원근무)과 접촉하여 독립선언문 200장을 건네 받고 군산으로 내려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박 연세, 송헌옥, 고석주, 김수영에게 전했으며 이를 전해받은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대표는 거사일을 군중이 많이 모이는 서래장날인 3월6일로 정하고 준비를 했으나 일본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어 학교를 급습, 인쇄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등 독립만세운동에 관련된 각종 문서를 압수하고 박영세, 이두열 두 교사를 압송했다. 이를 지켜본 교사와 학생 70여명은 이날 오후 군산경찰서 앞에서 연행한 두 교사를 석방하라는 구호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만세시위는 한강 이남의 최초며 호남의 최초로 기록되고 있다. 이튿날 3월6일 예정대로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예수병원 직원, 구암교회 신도, 일반시민 등 700여명이 서래장터를 지나 군산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을 외쳤다. 군산에서 3월5일부터 8일까지 만세운동으로 검거된 사람은 90명이었고 63명이 구속 송치되었다. 당시 군산지방은 3.5만세운동를 기점으로 군산보통학교 방화 항일운동, 옥구대야 장날 항일운동, 임피장날 만세운동, 군산재판소 판결 불복 시위 등 만세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으로 사망 53명, 실종73명, 부상 195명이나 되었다. 이로 인한 사상자수는 전북 도내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3,1운동 이후 3개월간에 걸친 만세운동은 통계에 의하면 202만3089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사상자 7,508명, 부상자 1,561명, 체포자 46,948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으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9세기 후반부터 이어 온 근대 국민국가 수립운동이 첫 결실을 보게 되었다. 3,1기미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101주년이 되는 해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에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모두가 하나가 되는 국민적 대통합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기도 하다.

 이복웅<(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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