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 김세환
이달의 독립운동가 : 김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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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0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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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환

김세환 선생은 1889년 11월 18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에서 태어났다. 청소년시기에 교회를 통해 선교활동과 함께 교육과 구국활동을 펼치는 인물들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였으며, 이들의 영향을 받아 교육가 및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이후 서울과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 신지식을 습득하고 1909년 말경 귀국하였다. 이후 수원상업강습소(이하 강습소, 현 수원중고등학교)와 삼일여학교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지역사회의 중추적 인물을 배출하고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는데 앞장섰다. 

 김세환 선생은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를 독립의 기회로 삼고자 3·1운동에 참여하였다.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순회위원’이란 막중한 임무를 띠고 활약하면서 수원지역의 3·1운동을 기획, 지도하였다. 

 그로 인해 1919년 3월 13일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선생은 기개를 잃지 않았고, 법정에서는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선생은 “그렇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여 독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같은 선생의 자세는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지방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선생은 1920년대 초부터 추진되던 민립대학설립운동에서 수원지역을 대표하여 참여하였고 신간회 수원지회장에 선출되었다. 한편, 박선태·김병호 등과 함께 수원체육회를 결성하여 수원지역의 민족운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다. 

 1939년 폐교 직전의 위기에 빠진 삼일학교를 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1941년에는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여 해방되기까지 교육에 힘썼다. 선생은 1945년 9월 26에 숨을 거두었으며, 개인묘지에 묻혔던 선생의 유해는 1968년 국립묘지 로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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