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전해산 장군을 숭모하며
의병장 전해산 장군을 숭모하며
  • 전병윤
  • 승인 2020.02.2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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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특집)
의사 전해산 기념관
의사 전해산 기념관

 큰 별이 삼일동안 밤하늘을 밝히더니

 전북 임실에서 신동 전기홍이 고고성을 울리었다네

 

  전해산(전기홍)은 유년시절 이한용 선생을 모시고 삼강오륜의 정신을 새기고 특히 역사와 시경과 병서를 통달하면서 충효와 신의와 정의감에 넘쳤던 전해산은 장부의 기개와 의협심을 꽃 피우기 시작 했다

 전해산장군은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치욕에 분개했다, 일본의 만행에 통분했다, 을사늑약을 찬동했던 오적(五賊)이 손 손 이어가면서 우리가슴 파헤칠 오적을 향해 통탄하면서 한 목숨 나라를 위해 불사르겠다는 붉은 의지를 갖고 이석용 의병장의 ‘창의동맹단’ 참모가 되었다.

 그 후 만인의 추대를 받고 의병장이 되어 ‘호남동의단’의 깃발 아래 오백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임실 장수 진안 전주 남원 순창 담양 영암 나주 광주 함평천지, 호남의 험준한 산야를 누비며 칠십여 차례의 전투에서 승전과 패전을 거듭하면서 왜적의 가슴을 서늘케 했다.

 특히 영광 불갑산 전투에선 매복전술로 적을 유인하여 적의 기마병을 격파시키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로 불갑산은 그 때를 못 잊어 가을이 오면 온 산에 꽃무릇 붉게 피워놓고 전해산 장군을 기린다.

 살얼음판 어려운 전쟁 중에도 부모님께 효를 다했다.“아버지 절 받으세요. 오늘이 부모님께 드리는 마지막 세배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 불효자식 하나 나라에 받쳐 주세요.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오냐 너 참 효자다. 알았다 어서 가거라.” 해산도 눈물을 닦고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몽매한 백성을 구하고 백척간두에 선 조국의 운명을 지키기 위하여 적진에 매복하면서 적의 발자국 소리를 재고 부하들의 졸음을 깨우던 밤, 앞뒤가 없는 전선의 휘영청 밝은 달밤이 서러웠다. 의병들은 생 옥수수와 산열매로 끼니를 때우고 주먹밥이 성찬이었던 부하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지 못해 해산은 가슴으로 울었답니다. 전우들은 노부모와 어린 병아리 같은 자식들을 두고, 갓 결혼한 새댁을 두고 왜군과 육박전을 하면서 흑장미 보다 더 붉은 피를 산야에 뿌려놓고 의병들은 조국을 위하여 갔습니다.

 전투 중에 많은 동지들과 참모들을 잃고 통곡했던 애끓는 가슴속을 하늘과 땅은 알았으리라. 그 후 순종의 의병 해산 명령이 내리어 하는 수 없이 후일을 기약하면서 <호남동의단>을 해산하고 남원 고래산으로 들어가 서당을 열고 후학 지도에 힘썼다. 유고로 ‘진중일기’가 있다.

 결국 현상금을 걸고 전 장군을 수배하던 중 배신자의 밀고에 의하여 체포되었으며 그 후 악독한 고초를 당하면서도 회유에 응하지 않고 ‘우국시’를 남겼다. 31세 청년 전해산 장군은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눈을 부릅뜬 채 순국을 해야 했다.

 

 우국시 “소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중략) 두견새 되어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거나.”

 

 주권을 빼앗긴 서러움의 형장엔 한 여름인데도 하얗게 서리발이 서리었다. 우리는 가신님을 잊지 않으려고 음력 9월9일에 장군의 추모제를 모시고 있다. 우리는 임들의 항일 자주 정신과 우국과 애국정신을 뼈에 새기며 마음을 다진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바치는 것은 충의 본이오, 대한 남아의 책임이다. 병역의무는 국방의 근본이다. 의병장 전해산 장군을 상기하자. 힘없는 국가는 역사의 제물이 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젊은이들이여! 국력을 기르는 데에 앞장서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의병정신 상기하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전병윤 시인(진안문인협회 초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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