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 어떻게 정리하고 싶은가요?
당신의 삶, 어떻게 정리하고 싶은가요?
  • 송일섭
  • 승인 2020.02.2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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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자만시(自輓詩)’ 또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등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곤 했습니다. 더러 유서 및 일기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한 것도 있지요.

‘자만시(自輓詩)’란 ‘자신의 죽음을 애도한 시’이고,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은 자신이 무덤에 스스로 쓴 묘지명(墓誌銘)입니다. ‘묘지명’이란 “죽은 이의 훌륭한 덕과 공로를 후세에 영원히 전하는 글”로 대개 다른 사람이 쓰는 것이 상례라고 합니다.

19세기 이양연이란 시인은 그의 자만시(自輓詩)에서는 ‘무덤가는 길 나쁘지 않군’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체념과 달관의 삶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한평생 시름 속에 살아오느라 / 밝은 달을 봐도 부족했었지.

이제부터는 만년토록 마주 볼 테니 / 무던 가는 이 길도 나쁘지 않군.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통해 18년의 관직 생활, 18년의 유배 생활, 또 이어진 18년의 해배(解配) 생활 등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역정(歷程)을 기록하였지요. 그의 자찬묘지명의 서두에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압축하고 있더군요.

네가 너의 착함을 기록한 것이/여러 장이 되는구나. 너의 감추어진 잘못을 기록하자면/ 책이 없어질 때까지 적어도 못다 적으리

눌재(訥齎) 라는 호를 지난 분은 이렇게 남겨 놓았더군요. 살아온 삶이 보통 사람에 불과했다는 겸손이 드러나고 있고, 이제 흙덩이로 남을 자신의 모습을 담담하게 서술했습니다.

재주도 없고/ 덕도 없고/ 보통 사람에 불과하고/ 살아선 벼슬이 없고/ 죽어서는 명예가 없는 / 보통 넋에 불과하다. //시름도 즐거움도 사라지고 / 헐뜯음도 칭송도 그친 지금 / 그저 흙덩이에 불과하구나,

강세황(1713-1791)은 ‘자만(自輓)’에 이어 자화상까지 남기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했습니다. 아래의 글은 자화상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얼굴은 물정에 어두운 꼴을 하고 있지만, 흉금은 시원스럽다. 평생 가진 재능을 펼쳐 보이지 못해서 세상에는 그 길이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 오로지 한가로이 읊은 시나 가볍게 그린 그림에서 때때로 기이한 자태와 예스러운 마음을 드러낸다.”

남종헌((1783-1840)도 이런 자찬묘지명을 남겼습니다. 관도 사용하지 말고, 옷가지도 넣지 말며, 묏자리를 가리지도 말고, 봉분을 꾸미지도 말며, 묘지명을 넣지도 말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직접 쓴 묘지명만 무덤에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말은 남들이 하지 않은 말만을 했고/ 행동을 남들이 하지 않는 행동만 했으며 /정례는 남들이 하지 않는 것만을 했다./ 남들이 그의 어짐을 말하지 않으니 / 내 알겠다. 그의 어리석음을

이 외에도 많은 묘지명이 있습니다. 걸레 스님 중광은 ”괜히 왔다 간다“라고 스스로 적어두었고, 박수근 화가는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다 멀어”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지는 꽃잎으로 그렇게 왔다 간다” 고 적었더군요. 또 조병화 시인은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어머님 심부름을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용인 천주교 공원묘원 성직자 묘역에 있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에는 “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성경 글 귀가 적혀 있습니다.

물론 서양에도 많은 묘지명들이 있더군요. 버나드 쇼(1856-1950)는 영국에서 세익스피어 이후 가장 뛰어난 문학가로 추앙받고 있는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입니다. 『인간과 초인』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이런 묘비명을 남겨서 더 유명해졌습니다. 짧은 문장 안에 담긴 독설과 해학에 또 한번 놀라게 됩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n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미국이 소설가 해밍웨이(1899-1961)는 고졸 학력이 전부지만, 미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로 뽑힐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린 분입니다. 세계 제1차 대전 때 운전병으로 참전하여 부상했고, 아프리카 탐사 때는 비행기 추락사고를 당하자 이마로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2차 대전 때는 자신의 개인 선박에다 포탄을 싣고 가서 독일 보트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는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의 소설을 써서 미국 최고의 작가가 됩니다. 그러나 62세 때 우울증으로 시달리다가 사냥총으로 자살했는데, 그의 묘에는 이런 묘지명이 있습니다.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Pardon me for not getting up)” 

 영국의 극작가 존 게이(1685-1732)는 풍자시(諷刺詩)ㆍ우의시(寓意詩)에 뛰어났습니다. 유머 넘치는 풍자와 탁월한 기교가 두드러진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로 유명한데 그의 묘지명은 특별합니다.

 “인생은 농담이야, 모든 것이 그것을 말해 주네.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죽어서야 알겠다.”

벤자멘 프랭클린(1706-1790)은 17살 때 가출하여 필라델피아로 갔고, 인쇄소 견습공이면서 주경야독을 하지요. 열심히 노력하여 마침내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인쇄소를 차렸고 1732년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을 출간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큰 재산을 모았고, 그가 번 많은 돈을 공공시절을 짓는데 후원하였지요. 펜실베이나 대학을 설립하여 초대 총장이 되었지만, 1747년에는 사업을 접고 정계에 투신하여 사회개혁 운동에 앞장섭니다. 1787년 헌법제정에 기여하고 공직생활을 마감하였지요. 그의 묘에는 이런 묘지명이 있습니다.

“출판업자 벤 플랭크린의 시신이 벌레의 먹이로 여기 누워 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늘 새롭고 우아한 판으로 개정될 것이기 때문”

이 외에도 체 게바라(1928-1967)는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였지만, 여행을 좋아하던 그는 쿠바를 여행 중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참여합니다. 1959년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고, 그는 ‘쿠바의 두뇌’로 불리면서 쿠바 정권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후 볼리비아 혁명에 참가하여 산악전을 펼치던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됩니다. 그후 바로 총살을 당했는데, 그때 자신에게 총을 겨누던 하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방아쇠를 당기시오. 당신은 단지 한 사람 그 한 명을 죽이는 것뿐이오.”

니코스 카잔자키스(1883-1957)는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났고, 1907년 파리로 유학해 베르그송과 니체의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하여 잘 잘 알려진 작가인데, 그의 묘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스탕달(1783-1842)은 프랑스의 소설가로 발자크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소설의 거장이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장편 『“적과 흑』(1830), 『파름 수도원』 등이 있는데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습니다.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니체(1844-1900)는 독일 철학자입니다. 그는 ‘비극의 탄생’으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인 형이상학으로 구축한 철학자인데 그의 묘에는 이런 글이 써 있습니다.

 “이제 나는 명령한다. 차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

베토벤(1770-1827)은 세계적인 작곡가인데, 말년에는 그의 청각을 잃고 말았지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남겼습니다. 

 “천국에서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요?”

우리는 각자 어떤 묘지명을 쓸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기를 소명합니다. 이 글은 안대회의 <선비답게 사는 것>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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