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은 명승의 고장, 창의도 활화산이었다
진안은 명승의 고장, 창의도 활화산이었다
  • 이용미
  • 승인 2020.02.2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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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특집)

 진안은 북동쪽을 무주에 남동쪽은 장수에

 남서쪽은 임실에 접하며 충남 금산과 도계를 사이에 두었다

 산으로 첩첩 산간벽지 대명사로 무진장이라 하였으나

 이제는 아름답고 청청한 고을

 사람들로 북적이는 천하 명승지

 마이산이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고

 탑사를 발치에 세운 돌탑의 유적지

 인삼을 주산으로 풍요로운 고을로 도약하였다

 운장산 또한 수려 청려하였는데

 오지 중에 오지인 이곳에

 우국충절의 열사들이 모여들어

 국권 회복의 외침이 하늘에 닿았으니

 순하고 온화한 군민들 분기하면

 매서운 칼날이 된

 진안을 일컬어 충의의 고장이라 한다

 80여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였으니 명실상부하다

 

 

 □ 마이산에 붉게 피어난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

 

 임실 사람 이석용 장군은

 국권 회복의 뜻을 예 와서 품었다

 임병찬 최익현을 만나 의병의 뜻을 맹세하여

 마이산 남쪽 용암 위에 깃발을 걸고

 호남의병 창의동맹단이란 이름으로 의진을 폈다

 의병의 수는 500이 넘고 후원하여 모인 수는 1000이 넘었다

 학문이 깊었던 장군은 장졸 이끄는 일에

 절도와 법제가 있었으니 호남 의병장의 으뜸이라

 호남 일원을 철환하여 진안 남원 임실 순창 곡성 등

 진군의 깃발은 하늘을 수놓았다 한다

 연전연승하였지만 하늘도 등 돌렸을까

 임실 전투에서 패한 후 긴긴 유랑의 세월

 1913년 임실에서 피체 후 대구 형무소에 이감되었다

 사형으로 교수되니 정부는 그의 훈격을 높이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후손들도 독립운동에 투신하니

 충의로운 가통을 만인이 칭송하였다

 

 

 □ 마령 장터 3·1만세운동

 

 진안읍 장날 만세 운동도 세찼거니와

 산발적으로 주천면 등지에서도 이어졌다

 그 중에 마령면 만세운동은 치밀하고 규모도 컸다

 국권 회복 오기열 전영상 등의 영도가 주도면밀하였으니

 저 산간 우지의 애국 열도가 뜨겁다 할 것이고

 오기열 전영상 등은 후일

 일본 관헌에 잡히어 힘겨운 징역살이를 했다

 주권이 상실되자 분기로 일어나

 왜병들을 쫓으니 장하고 장한 애국투사들이라

 

 

 □ 황병승 의병장의 장렬한 생애

 

 1907년 대한제국군 참령으로 있다가

 군 해산 명령에 반대하여 항쟁

 1908년 내란 죄로 10년 유형 완도에 유배되다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총기로 무장하고 전남 여러 섬과

 해남에서 의병활동 전개하여

 마침내 의병장이 되고

 강선택 추기엽을 부장으로 의진을 펼치며

 일진회 박원재, 밀정 진태진을 총살하였다

 대둔산 미황사를 중심으로 맹활약하다 피체되었다

 폭동 모살의 죄목으로 광주 재판소 선고 후

 교수형을 받아 장렬히 순국하였다

 한 생애를 오로지 애국 전선에 투신하였으니

 역사상 어느 영웅보다 그 공훈 빼어났고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어

 청사에 그의 이름 금박이로 얹게 되니

 장하고 우뚝하여라

 

 이용미 수필가(수필과비평작가회의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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