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한사국
독립유공자 한사국
  • 한선자
  • 승인 2020.02.2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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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특집)

 한사국은 개항기 전북 진안 출신의 의병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 수 없으나 인품이 준수하고 강개심이 있었으며 문장에 아주 능하였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으로 국가 멸망의 분명한 징후 앞에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한사국은 1907년 9월 12일에 이석용에 의해 진안 마이산에서 결성된 의병부대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에 가입하게 된다. 한사국이 속해 있는 호남의병 창의 동맹단은 결성 후 2년 동안 다양한 규모의 병력으로 진안 용담 장수 임실 전주 순창 광주 곡성 남원 운봉 함양 등의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례로 1907년 9월 13일 아침 진안읍 반월리에 이르러 주둔해 있던 일본군들을 습격하기 위해 진안읍 앞산에 있는 우화정에 본진을 쳤다. 그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집중 포화를 가하자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 하였다. 일본 헌병대장 호리구치 겐지로는 왼팔에 총탄을 맞았고 다른 일본군들은 옷마저 제대로 입지 못한 채 전주로 도망쳤다. 습격 당시에 군율이 잘 시행되어 양민에게는 조금의 피해도 없었고 격문을 만들어 사방으로 전달하였으므로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한사국은 이석용이 의병대장으로 있는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에서 전해산 이광삼 등과 함께 참모로 활동하였고 두뇌가 명석하고 문장력이 뛰어나 전해산과 진중의 일을 기록하는 기실의 임무도 맡았다.

 한사국은 일제의 제국주의적 수탈에 항거하기 위하여 왜병들과 대치하여 전투를 벌이게 된다. 여러 유격 활동에서 참모로서 지략을 다하였다가 1908년 3월 21일 운현에서 일본군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16명의 의사와 함께 순절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이석용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태인 의병을 일으킨 면암 최익현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문인이었다. 전북 진안에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을 결성하여 첫 번째 출진하여 진안읍 공격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자 이석용의진의 명성이 전라북도 지방에 곧바로 퍼졌다. 그리고 용담에서는 김동신의진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접전하기도 했다. 1908년 9월 임실전투에서 패하여 의병진을 해산하고 유랑하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체포되었다. 1914년 1월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아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되어 순국하였다.

 1998년에 한사국이 활약했던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 결성지비가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이산묘 앞에 건립되었다. 이 비는 1907년 정재 이석용을 필두로 1,000여 명이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을 결성함으로써 호남 의병 운동의 효시된 것을 기리기 위한 비로소 이산 향토 문화 연구회 회장 오귀현에 의해 건립되었다. 일제에 항거하여 조국의 지킨 애국지사를 길이길이 되돌아 살피며 우러러야 한다.

한선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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