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문화와 손글씨
‘빨리빨리’ 문화와 손글씨
  • 김동근
  • 승인 2020.02.17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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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우리의 삶은 통신기술과 AI(인공지능) 기술 덕분에 편리해졌고 효율성이 높아졌다. 반면 삶의 여유가 없어지면서 조급해졌고 업무의 강도는 높아졌다. 인간은 좀 더 여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켰지만, 이제는 여유로운 삶을 살려면 기술의 혜택을 대폭 줄여야만 가능하게 되었다.

 강준만 교수가 쓴 <한국인 코드>에서 한국인들은 ‘속전속결’을 워낙 사랑하는 기질이 있기 때문에 로또 복권을 사더라도 금요일이나 토요일 그것도 마감시간 직전에 가장 많이 구입한다고 한다. 이에 반해 외국에서는 로또 복권이 주초에 많이 팔린다고 한다. 환상일지라도 1주일을 로또 복권 당첨을 기대하면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속전속결’, ‘빨리빨리’ 문화는 우리나라의 특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영국 여행가이며, 지리학자이자 작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조선을 네 번이나 방문하면서 느꼈던 점을 기록한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한국인들은 ‘게으르고 느리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눈에는 “조선이 개혁이 되었다고 하지만 한국은 아직도 두 계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다.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 계급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계급, 그리고 인구의 나머지 4분의 5는 ‘하층민’인 평민계급이 그것이다. 후자의 존재 이유는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속전속결’,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전쟁과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된 중앙집권식 경제개발로부터 시작되었다. 서구역사를 살펴보면, 산업화에 비례해서 삶의 속도가 빨라지게 되는데,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경제가 빨리 성장하고 발전하다 보니 ‘빨리빨리’ 문화가 우리 삶에 정착되었다. 이러한 ‘빨리빨리’ 문화는 디지털시대를 맞이하여 더 빛을 발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경쟁력의 근원은 ‘빨리빨리’로 대표되는 속도에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업무가 가능하고 외국에 나가 있어도 통화가 가능하다 보니 ‘빨리빨리’의 조급증도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메일뿐만 아니라 문자 또는 SNS에서 확인을 하지 않거나 확인을 하고도 대답을 늦게 하면 상대방은 ‘바로 확인하고 즉시 답을 줘야지 왜 빨리 답을 하지 않느냐, 그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빨리빨리’ 문화는 우리 경제와 문화 등을 발전시킨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음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졸속의 원리’이다. ‘빨리빨리’ 하다 보면 아무래도 ‘대충대충’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빨랐지만, 전통문화를 없애는 것도 빨랐다. 197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천 년 이상 내려온 초가지붕을 없애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싹 바꾸어버렸다. 초가집은 지금은 민속촌에 가야만 볼 수 있다. 교육정책만 해도 그렇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해서 문제가 있더라도 그 부작용 때문에 조금씩 보완해 가야 하는데 집권하는 정부마다 교육정책을 자주 바꿔서 학부모와 수험생들이 힘들어하였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조그만 도로공사부터 국가의 중대한 정책 결정까지 너무 조급하게 추진된 사례는 부지기로 많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의 교육이다.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빨리빨리’ 문화도 필요하지만, ‘빨리빨리’ 문화에서 벗어나는 교육도 필요하다. 아이들은 이미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아이들은 직접 손으로 글씨를 쓰기보다는 키보드나 화면에 보이는 자판을 터치하면서 글을 쓰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글을 쓰더라도 제대로 된 문장보다는 단어를 축약해서 글을 쓰는가 하면 글자의 모음이나 이모티콘만으로 의사를 표현하기도 한다. 현재 세계 각국의 교육당국은 미래의 고용조건에 맞춰 ‘타이핑’이나 ‘코딩’수업을 필수로 지정하고 ‘손글씨’ 수업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2014년 캘리포니아대(UCLA)의 ‘키보드보다 더 강력한 펜(The Pen is mightier than the Keyboard)’라는 연구에 따르면, 학생들에게 강의내용을 노트북과 펜·종이로 받아 적게 하고, 강의 내용과 관련한 사실과 개념 문제를 풀게 하였다. 그랬더니 펜·종이로 필기했던 학생들은 노트북으로 필기했던 학생들보다 좀 더 깊은 내용까지 기억해냈다. 글씨를 쓰거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은 모두 손가락을 사용하지만 손글씨를 쓸 때 훨씬 높은 집중력과 기억력을 보여준다는 연구결과이다. 타이핑은 손글씨 보다 빠를 수는 있지만, 받아쓰는 사람에 맞게 ‘개인화’된 정보가 아니라 단순한 ‘강의기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느리더라도 아이들이 직접 손으로 글씨를 쓰는 교육을 하여야 한다. 아이들의 집중력과 기억력 향상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현재의 문화를 다음 세대에 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세대만 손글씨를 배우지 않으면, 수백 년에 걸쳐 손으로 쓴 기록물들을 결코 읽을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글이 후세대에 제대로 지켜질지 우려스럽다는 표현이 과한 것은 아니다.

 김동근<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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