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2)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25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南原城 함락, "시체가 산처럼..."남원의총(南原義塚)에 묻혀
남원 만인의총 / 연합뉴스 제공
남원 만인의총 / 연합뉴스 제공

  5월중에 부총병 양원(楊元)의 中軍 이신방(李新芳)이 군사 2천을 거느리고 들어왔고 6월13일에는 양원이 1천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明軍은 모두 3천명이 되었다.

 남원부사는 임현(任鉉) 판관은 이덕회(李德恢)였다.

 양원군사와 함께 한달에 걸쳐 성벽을 높이고 총과 대포를 쓸 수 있는 구멍을 뚫었으며 성 밖에 호(濠)를 더 깊이 팠다.

 남원성 밖 10리지점에 견고한 교룡산성(蛟龍山城)이 있었다. 당초 조선군은 교룡산성에서 결전을 펴기로 하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명에 따라 의승장 처영(處英)의 승병들이 산성을 수축하고 군량미를 비룩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두었다. 그런데 산성전 보다 야전에 능한 요동병 출신 양원이 邑城戰을 고집, 남원성을 지키게 된 것이다.

 남원성에는 방어사 오응정(吳?井) 순천부사 오응정(吳應鼎)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등이 있었으며 8월6일에는 구례(求禮)현감 이원춘(李元春)이 들어왔다. 8일에는 성벽에 병력을 배치했으며 10일 교룡산성과 성 밖의 가옥을 모두 불태워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12일 적의 선봉이 이미 요천강(蓼川江)변에 도달해 성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조방장 김경노(金敬老) 교룡산성 별장 신호(申浩)가 군사 수백명을 거느리고 나각(?角)을 불고 북을 치며 “물러가라”며 평소 병사 행차의 위용을 갖추어 성문으로 들어왔다. 느닷없이 이 대담하고 진기한 행렬이 나타나자 일본군은 얼떨결에 공격할 생각도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13일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산발적인 사격전이 벌어진 끝에 오후 2시 쯤 성밖 백여보까지 접근한 적군이 일제히 조총 사격을 가해왔다.

 조선군의 신무기 비격진천뢰가 날아가 여기 저기서 터졌다. 적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섰다.

 양원과 이신방은 동문, 명군 천총 모승선(毛承先)은 서문, 천총 장표(蔣表)는 남문 그리고 병사 이복남이 북문을 지켰다.

 14일 적의 포위망이 더욱 두터워 지면서 공격이 격화되었으며 서문밖 만복사(萬福寺)의 사천왕상(四川王像)을 뜯어 수레에 싣고 와서 시위를 벌였다. 양원이 1천 군사를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 적진으로 돌격했다가 포위를 당해 급히 퇴각해 들어오기도 했다. 그는 원래 守城戰이 아니라 야전의 용장이었다. 하루종일 공방전이 벌어졌다.

 全州城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구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15일 전투가 소강상태로 들어가고 양원과 적장 사이에 연락병이 몇차례 오고 갔으나 성과가 없었는지 저녁 무렵 적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일본군은 잡초와 논의 벼를 베어다가 호를 메우고 여기 저기 흙무더기를 쌓아 성 높이로 하여 그곳에 올라 공격했다. 밤새워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피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16일 비가 그치고 날씨가 무철 맑았다. 남원성 최후의 날이 왔다.

 명군 3천에 조선군을 포함 5천을 넘지 못하는 수비군과 5만이 넘는 공격군의 대결이었다. 수비군 쪽에 명군의 불낭기포(佛郎機砲) 3문과 조선군의 호승포(虎?砲) 10문 그리고 수미상의 대완구가 불을 토했으나 공격군쪽 조총 수천정의 화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이날 저녁 일본군의 총 공격이 감행되고 적군 장수들이 선봉에 서 성벽을 타고 넘어오자 수비군은 걷잡을수 없이 무너져 갔다. 이날 밤은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조선군쪽의 이복남 김경노 신호 오응정 임현 이덕회 이원춘 정기원 등 장수 전원, 명군쪽의 이신방 모승선 장표 등 장수들과 수비군 거의 전원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명군 3천중 살아 돌아간 수는 백여명에 그쳤고 부총병 양원만이 성을 탈출, 혈로를 뚫고 살아 돌아갔으나 明 조정의 군법회의에 넘겨져 처형됐다.

 ‘성안의 사람은 남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은 산 짐승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비참할 뿐이다. 사람이라고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죽어 엎드려 있을 뿐이다’(日本軍 從軍僧 慶念의 朝鮮日日記丁酉年 8월16일자)

 ‘새벽에 성 밖을 내다보니 길가에 시체가 모래산처럼 쌓여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경이다’(위 책 8월18일자)

   한편 같은날 밤 모리수원의 우군은 진격을 가로막은 만석산성(萬石山城)의 조선군에 전면 공격을 가했다. 달이 너무 밝아 야간공격에 큰 도움을 주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도별장 백사림이 마음이 변해 북쪽 성문을 열고 가족들과 함께 도망치면서 적군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군사들보다 백성들이 더 많은 오합지졸의 수비군이었다. 500여명이 모두 학살됐다.

 수비대장 안음현감 곽준, 그의 두 아들 이상(履常) 이후(履厚) 3부자 조종도와 그의 부인 李씨 등도 모두 죽었다.

 황석산성을 돌파한 우군은 곧바로 육십령(六十嶺)을 넘어 長水땅 장계를 거쳐 鎭安을 지나고 곧바로 全州城으로 짓쳐 들어갔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8월19일 게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