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3)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3)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27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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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 日軍 육십령 황석산성 돌파 鎭安-全州城 진격

  남원성의 좌군도 全州를 향해 북상을 시작했다. 협판안치 등의 수군은 하동으로 돌아갔다.

 남원성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李정암의 뒤를 이은 박홍노(朴弘老)와 교대 된 전라감사 황신(黃愼)은 산중으로 피난을 간채 행방을 알수 없었고 도사(都事) 김순명(金順命)은 금성(金城:담양군)에 있다가 역시 행방불명이 되었다.

 일본군이 鎭安과 南原으로부터 협공을 해오자 全州부윤 박경신(朴慶新)이 당황하여 明나라 유격장 진혜충(陳愚衷)에 성을 버리고 떠나자고 했으나 진우충이 거절하자 성문을 지키는 명나라 군사를 죽이고 탈출해 버렸다. 백성들도 성을 나가 피해버려 명군만 남게되자 진우충도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 북으로 퇴각했다.

 8월25일 全州城에 일본군 좌군 5만, 우군 6만 모두 11만여 병력이 무혈입성했다. 성안팎이 온통 일본군으로 넘치고 찼다.

 일본군으로서는 감격스런 승리가 아닐수 없었다. 6년전 개전 초 7월9일 웅치(熊峙)를 돌파, 이곳 전주성 밑까지 진출했다가 고경명(高敬命)군이 금산(錦山)의 사령부기지를 배후에서 급습하는 바람에 황망히 퇴각한 뒤 끝내 점령하지 못했던 전라도의 심장부 전라감영(全羅監營)이었다.

 전주성을 점령한 뒤 일본군 장령들이 작전회의를 갖고 진격로를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좌군 선봉 소서행장군 일대는 곧바로 남진하여 구례-순천을 점령하고 왜교(倭橋)에 진을 치는 한편, 광양에 군사를 나누어 주둔했다.

 좌군 사령관 우희다수가 및 도진의홍 봉수하가정軍 그리고 소서행장군 일대는 8월27일 全州城을 출발하여 익산-용안-석성-부여로 진출했다가 임천-한산을 지나 9월7일 서천(舒川)을 치고 다시 용안-함열-익산으로 돌아와 일대는 금산-진산-회덕으로 보내고 본대는 전주를 거쳐 금구(金溝)로 나가 井邑으로 들어갔다.

 금구를 지나다 전라도 조방장 원진과 김언공(金彦恭)군으로 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으나 조선군이 곧 사라져 버렸다.

 우군사령관 모리수원 선봉장 가등청정 및 흑전장정군은 8월29일 전주성을 나서 퇴각하는 明의 진혜충군을 뒤쫓으며 여산(礪山)-은진(恩津)-公州로 북진하여 가등청중군은 청주로 빠지고 이중 과도직무군은 따로 떨어져 전라도로 돌아가 정읍에서 좌군과 합류했다.

 公州에서 그대로 북진을 계속한 흑전장정의 우군주력은 연기(燕岐)-전의(全義)를 지나고 천안을 지나 선봉 5천명이 직산(稷山)으로 내달았다. 한성을 1백50리쯤 남겨놓고 있었다.

 조선의 조정은 다시 한강에 방어선을 폈다. 평안도 군사 5천명과 황해도 경기도 군사 수천명을 한강 연안에 포진했다.

 이에앞서 평양에 있던 明軍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9월3일 한성에 들어와 南山에 진을 쳤으며 정병 8천명을 뽑아 부총병 해생(解生) 참장 양등산(楊登山) 유격장 우백영(牛伯英) 등이 지휘케 하여 9월6일 야간 행군으로 천안으로 급진 시킨뒤 유격장 파쇄에 2천 병력을 주어 뒤를 받쳤다. 모두 1만명이 되었다.

 7일 아침 일본군 선봉 600여명이 직산 남쪽 10리 지점 소사평(素砂平)에 이르렀을때 해생이 이끄는 명군 2천여명이 일본군 선봉을 포위하고 돌진하여 미원(未院)벌판에서 격전을 벌였다. 명군은 사기도 높았고 화력도 우수했으며 야전에 능하여 강력했다. 일거에 일본군 선봉을 짓밟았다.

 예봉이 꺾인 흑전장정의 일본군 우군 주력이 그 길로 뒷걸음질 쳐 公州로 갔다가 동쪽으로 달려 조령(鳥嶺)을 넘어 문경(聞慶)을 지나고 尙州에서 가등청정과 만난 뒤 10월중에 양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앞서 가등청정군 1만여명은 청주로 간 뒤 진천에서 우군 본대와 헤어지고 충주까지 진격했다가 대세가 불리하지 남하를 시작하여 조령을 넘었고 함창(咸昌)-상주를 지나 일부는 대구로, 일부는 공산성(公山城:달성)으로 들어갔다.

 모리수원 등 우군 본대는 옥천(沃川)-황간(黃澗)을 지나 성주로 들아갔다.

 한편 우희다수가의 좌군 주력은 15일 정읍에서 작전회의를 가진 뒤 그 일부가 순창-담양-광주-창평-옥과-동복-화순 방면으로 남하했다.

 2차 침공 일본군이 수길의 명령대로 全州城을 점령한뒤 전라도 일대를 휩쓰는 한편 북으로 진격하다가 더이상의 진군을 멈추고 방향을 급선회하여 남해안 일대로 철수해 내려온 것은 직산(稷山)전투에서의 패배와 함께 남서해 명량(鳴梁)에서 재건된 조선수군 이순신 함대에 일본 수군이 대패, 해로가 끊긴데 따른 것이었다.

 7월15일 칠천량(漆川梁)해전에서 원균 휘하의 조선수군이 전멸하자 당황한 조정이 22일 다시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진주(晋州)-정개산(鼎蓋山)에서 백의종군 하던 이순신이 8월3일 달려온 선전관 양호(梁護)로 부터 교론서(敎論書)를 받자 그날로 길을 떠나 구례-곡성-옥과-수넌-낙안으로 적진속 500여리를 뚫고 18일 회녕포(會寧浦:장흥군 대덕면 회진리)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칠천량 해전때 경상우수사 배설이 타고 탈출했던 전함 12척을 이끌고 29일 벽파진(碧波津:진도군 고군면)에 이르렀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8월19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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