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특집> 무주 신명선과 칠연의총
<광복회 특집> 무주 신명선과 칠연의총
  • 전선자
  • 승인 2020.02.13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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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

 덕유산과 구천동이 어우러진 천혜의 풍광을 안고 있는 무주. 풍광만큼이나 무주의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의 자취가 궁금하다.

 신명선과 칠연의총, 항일학생결사회를 통해 학생운동을 전개한 최낙철과 이완기, 강무경 임익상 장광옥 장군선 한진수 황대선 의병장 등 독립운동 24명(의병 19, 3·1운동 1, 해외 2, 학생 2)의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다.

 칠연의총을 찾아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적상산이 색색으로 곱고 길가에 심은 단풍나무들이 물들어 눈길을 끌었다. 그 가운데 칠연계곡은 무주에서도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산야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나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 바친 의병들의 넋이 서린 곳, 칠연계곡에 칠연의총이 있다.

 칠연의총은 구한말, 국권수호를 위해 덕유산 일대를 누비며 활약하던 항일의병장 신명선과 그의 부하들이 잠들어 계신 성역이다. 의병은 일본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선 순수하고 자발적인 군대다. 칠연의총에 잠든 의병들 역시 나라를 위해 스스로 일어선 백성들이다

 

 □ 칠연의총 앞에서

 칠연의총 앞에서 의병장 신명선을 생각한다. 신명선은 대한제국의 핵심 부대였던 시위대 출신이다. 신명선은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되자 무주의 덕유산을 거점으로 150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무주·진안·장수, 경남 거창·함양, 충북 옥천을 오가며 광범위한 의병활동을 펼쳤으며, 일본군과 싸워 숱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1908년 4월 장수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계속된 접전으로 피로가 겹친 의병들은 덕유산 칠연계곡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수적인 열세로 150여 명이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이때 살아남은 의병 중 한 명이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유해를 수습해 송정골에 안치했다. 이후 1969년 지역 향토예비군이 흩어진 유해를 다시 수습해 묘역을 정비한 뒤 ‘백의총’이라고 불렀으며, 1976년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칠연의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 무주의 의병사

 무주 덕유산 의병으로 전사 옥사 교수형을 받아 순국한 의병은 16명, 7~15년 징역형과 종신유형이 26명이나 되었다. 판결문이 남아 있는 60명 중에 26명은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중 15명은 7~15년 징역형을 받은 분이다.

 무주·덕유산 자락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장병은 김동신 노병대 문태서 박춘실 신명선 유종환 이장춘 전성범 등인데, 이들이 이끈 의진에 대하여 이태룡 박사가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무주는 ‘덕유산 의병길 체험순례’ 행사를 통해 임들이 남기고 가신 발자취를 더듬으며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덕유산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역사의 아픔을 안고 있다. 임진왜란 때 산속으로 숨어든 백성들은 다행스럽게도 짙은 안개가 드리워지며 왜군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덕이 있는 산’이라 하여 덕유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덕유산은 전북 무주와 장수, 경남 거창과 함양 등 4개 시군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자락이 넓고 평평해 넉넉한 기품이 그대로 느껴지지만, 구한말 일본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난 의병들의 은신처이자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전선자(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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