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연의병 신명선 장군을 기리며
칠연의병 신명선 장군을 기리며
  • 이연희
  • 승인 2020.02.13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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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특집)

 종종, 내 고향 무주에 간다.

 고향집에서 묵는 날에는 새벽 산책을 한다. 오늘도 나는 어둑어둑한 박명 속의 길을 더듬어 낯설지 않은 풍경에게 눈인사를 건넨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낙엽들이 이따금 바스락 소리를 낸다. 계절 탓인가! 집을 나설 때의 상쾌한 기분과 달리 홀로 걷는 이 길이 쓸쓸하다. 그렇게 타박타박 계곡을 따라 오른다. 숲은 더 환해지고 있는데 나는 아직 어둡고 무겁다.

 포르릉 지지배배 산새가 날아든다. 맑디맑은 새소리를 듣는다. 새들의 노랫소리에 발걸음이 조금 가볍다. 문득, 오래전 이 길에서 잠시 들렀던 칠연백의총이 떠올라 그곳으로 향한다. 100여 명의 의병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순국한 곳,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그 중에 한 사람, 신명선이 있었다.

 신명선, 그는 첩첩산골 무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형제애가 다습고 의협심이 강하여 동네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농사일을 하는 부모를 대신하여 집안일과 동생 돌보기를 잘하는 심성 바르고 착한 아이였으며 반듯한 청년이었다.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족과 오순도순 평화로이 살던 그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일본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해 잠 못 이루며 괴로워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분통함에 젖어 지내던 중 1907년에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일제에 의해 구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신명선은 그 해 8월, 무주 덕유산을 거점으로 동지를 규합해서 의거하였다.

 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 결의를 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문금서와 함께 부하 150여 명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무주와 경상남도 안의 일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같은 해 10월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양원사에서 의병장 김동신의 의진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순창 무주 진안 등지에서 항일투쟁과 국권회복운동을 독려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그 무렵, 국권을 지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는 의병전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수많은 의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우세한 무기와 병력으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펴는 일본군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의병들의 고난과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신명선 역시 시시때때로 죽을 고비를 넘겨야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았다. 재정이나 물자가 넉넉지 않아 끼니조차 건너뛰어야 하는 의병들을 위해 같은 해 11월 30일경에는 황덕화, 황이만 등 부하 10여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전라북도 금산군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사는 음대보와 김내삼의 집에 들어가 의병운동을 위한 군자금으로 금 23냥을 헌금 받아 의병활동 경비로 사용했다.

 이듬해 4월 10일에는 문태서와 함께 장수읍을 습격하였다. 마침 주재소의 일경들은 모두 의병토벌작전에 동원되어 나가고 한인 순사 한 명만 있었다. 따라서 별다른 저항 없이 주재소의 기물을 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기세를 몰아 신명선은 학교, 군청 등의 부속건물 그리고 일인가옥 13동을 불태우고 유유히 무주 쪽으로 퇴거하였다. 그는 동지들을 지휘하여 무주·안성 등지로 이동하면서 거침없는 활약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을 추격한 일본군 부대와 안성의 칠연계곡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최후의 순간까지 사투를 벌였지만 일본군의 무기와 병력 앞에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이에 의병 100여 명이 안타깝게도 모두 이곳에서 순국하였으니 참담하고 원통한 일이었다.

 신명선이 이렇게 생을 거두자 그의 아우는 비통함에 젖어 여러 날 울부짖다가 형의 뒤를 좇아 계속 의진을 이끌었다. 신명선의 아우는 그해 4월말, 또다시 장수읍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남겼다고 하니 애국심 강한 형제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하고 절로 숙연해진다.

 1975년 안성면민들은 이들의 의로운 유해를 모아 묘소를 정화하고 칠연백의총이라 명명하였으며, 1977년 정부에서는 신명선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나는 지금 꿈결인양 칠연의총 앞에 서 있다. 인적 드물고 적막하기 그지없는 산 숲에 외로이 잠들어있는 영령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하고 국가의 안위를 위해 두 손 모은다.

 일곱 개의 못이 연이어 형성되어 칠연이라 부르는 곳. 기암절벽에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이곳에 이름도 빛도 없이 잠들어 있는 그들을 위로하려함일까! 그나마 그들 곁에서 사계절 꽃이 피고 새들은 노래한다. 후대의 사람들은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할지언정 말이다.

 세월이 흘러 광복 74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처한 국내외 사정이 그리 녹록치 않으며 더욱이 일본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우리가 날마다 누릴 수 있는 평화 속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고귀한 희생이 깃들어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연희(수필가, 문예가족 회장 역임, 김환태문학제전위원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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