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 서정환
  • 승인 2020.02.0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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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버드대 심리학자 대니엘 길버트 교수는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배경이나 환경이 아니라 일상의 순간에 대한 집중도’라고 말했다.

 20세기 최고의 소설가 중 한 명인 마르셀 프루스트가 친구이자 작곡가인 레이날도 한과 함께 남프랑스에 있는 어느 대저택 정원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이 진홍색 꽃이 핀 벵골장미나무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프루스트가 말을 중단하고 걸음을 멈췄다. 레이날도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친구를 의식한 프루스트는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도 가지 않아 다시 멈춰 서더니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잠시 뒤에 남아 있어도 되겠나? 먼저 가면 곧 뒤따라가겠네. 조금 전의 장미꽃들을 다시 보고 싶어서 그래.”

 레이날도는 프루스트를 혼자 두고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갈림길에서 돌아보니 프루스트는 장미나무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레이날도가 대저택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그 자리로 올 때까지 프루스트는 똑같은 장소에서 미동도 않고 장미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으며 눈썹까지 약간 찌푸린 채 미묘한 꽃들에 몰입해 있었다.

 레이날도가 그 옆을 한 차례 더 지나간 다음에야 프루스트는 몰입 상태에서 깨어나 친구를 부르며 달려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친구에게 “화나지 않았나?” 레이날도는 그렇지 않다고 미소를 지어 보였으며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중단되었던 대화를 이어갔다. 레이날도는 프루스트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그 장미나무에 대해 묻지 않았다. 전에도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레이날도는 회상기에 썼다.

 “그런 신비한 순간들을 얼마나 많이 목격했던가! 그 순간들에 마르셀은 자연, 문학, 인생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 ‘깊은 순간들’ 속에 온 존재가 물아일체로 잠겨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사람들과의 교류에서도 소설의 줄거리를 얻었지만 흔한 가시나무나 장미꽃 앞에서 보낸 몰입의 순간들 속에서도 많은 영감을 얻었다.

 프루스트는 아홉 살에 시작된 천식으로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었다. 장미나 꽃들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천식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앙드레 지드가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출간을 거부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런 많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몰입해서 경험한 사물들에 대한 기억은 소설 집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몰입의 순간에 그는 ‘나는 더 이상 하찮고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 라고 느꼈다. 나아가 ‘한 송이 꽃의 기적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바뀔 것이다.’라고 썼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제는 우리가 많은 순간들을 잃어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기만 하면 모든 사물은 그 속을 가지고 있다. 종교에서는 그것을 ‘신의 파편’이라 부른다. 그래서 각자가 독특하고 신비하다.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심각한 장님은 없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귀머거리는 없다고 한다.

 우리는 보고 느끼기 위해 태어났다. 그 밖에 꼭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몰입하고 감동할 줄 아는 영혼을 가지고 우리는 이곳에 왔으며, 그 몰입과 감동이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인생을 살아나가게 하는 힘이다.

 진정으로 바라봄이야말로 사랑의 행위이다. 눈앞의 세상을 보지 않고 삶을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영혼이 고통받는다. 깊이 바라보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질문만이 있을 뿐이다. ‘세상을 사랑하는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류시화의 말이다.

 서정환<신아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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