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5)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5)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16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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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회담(講話會談) 깨지며 丁酉年 2차전쟁 터져

  1596년 1월4일 소서행장과 심유경이 다시 일본에 건너갔다. 明의 사신이 늦어지는데 대해 설명하고 영접절차를 준비한다는 구실이었다.

 그사이 일본군 진영에 있던 책봉사 이종성(李宗城)이 일이 순조롭지 못함을 깨닫고 불안한 나머지 천하 大明國 사신의 체면도 잊고 4월3일 한 밤중, 일본군 영을 탈출하여 15일 한성에 도착한뒤 25일 명나라로 돌아가 버리는 이변이 일어났다.

 6월15일이 되어 양방형(楊方亨)이 정사가 되고 심유경이 부사가 되어 그 사이 부산으로 돌아온 소서행장의 안내를 받아 일본배 121척에 나눠타고 위용을 갖춰 일본으로 향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책봉사 일행과 함께 통신사를 보내라는 일본의 요청과 명의 압력에 이기지 못해 황신(黃愼)을 정사로, 박홍장(朴弘長)을 부사로 하여 309명의 사절단을 편성, 8월4일 일본으로 향하게 했다.

 두나라 사절단은 閏(윤) 8월18일 계(堺:사까이)에서 만나 9월1일 대판(大阪)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자신이 제시한 7개 조항중 조선의 왕자와 사신을 볼모로 보내라 했는데 같이 오지 않았다 하여 조선통신사 일행은 접견도 하지 않았고, 2일 명나라 사신만을 접견했다.

 이 자리에서 명의 책봉사 일행이 정중히 예의를 갖추었고 일본측에서는 풍신수길 이하 50여 장령들이 엄숙히 배석한 가운데 明황제의 고칙(誥勅:誥命과 勅命.고명=誥命冊印이라하여 중국이 대국으로서 이웃 여러나라 왕의 즉위를 승인하고 문서와 金印을 내려 줌. 조선 왕조의 역대 왕들은 명과 청으로부터 고명과 책인을 받아 왔다. 책론=중국 황제의 지시 또는 말)을 바쳤다.

 수길이 엎드려 절하며(배궤拜?)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수길이 이를 알리 없었다. 심유경이 탓하자 종승(從僧)이 수길이 무릎에 종기가 나서 그렇다고 둘러 붙었고 심유경이 모른척 넘겼다. 3일에는 수길이 잔치를 벌여 명의 책봉사를 환영했다.

 드디어 운명의 순간이 왔다.

 소서행장과 심유경이 온갖 수단을 다해 명 조정은 수길이 항복한 것으로 속이고 수길에는 명의 사신과 조선 통신사를 일본으로 불러들여 체면을 세워 줌으로써 무모한 침략전쟁을 매듭지으려 했던 3년여의 모든 계략과 노력이 잠깐 사이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수길이 잔치끝에 화전(花?)산장으로 덕천가강(德川家康) 등 7명의 원로장령과 중 승태(承兌) 령삼(靈三) 영철(永哲) 3인을 불러 明의 고칙을 읽어보라 했다. 소서행장이 사전에 비밀리 승태에 수길의 뜻과 어긋나는 부분은 적당히 비껴서 읽어주라 해 두었는데 승태가 곧이 곧대로 읽어버렸다.

 수길에게는 기절할 내용이었다.

 7개 조항은 간곳이 없고 ’너를 일본국옹으로 봉한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왕이 되려면 그대로 되면 됐지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을것이 무언가"

 수길이 분노하여 미치다시피 했고 소서행장을 당장 베려하며 사신들도 모두 죽이려 하자 석전삼성(石田三成) 대곡길계(大谷吉繼) 증전장맹(憎田長盛) 등 이른바 3봉행(奉行)이란 원로 장령들이 해명하고 말려 겨우 진정시켰다.

 수길이 7개항을 조선과 직접 교섭하는 방책이 없느냐 묻자 소서행장이 급한김에 "말로 할게 아니라 전투로 해야 합니다"며 느닷없이 강경론을 폈고 가등청정이 앞장 서겠다고 나서 수길은 두나라 사신을 즉시 퇴거시키고 재침을 명령했다.

 수길은 일단 무력으로 조선 4도를 점령한뒤 강화회담을 통해 자신의 7개조건을 관철시킬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주공은 1차전쟁때 점령해 실패했던 전라도에 두기로 했다.

 이렇게되어 조선에는 걷혀져 가듯 한던 전운이 다시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퇴거를 당한 책봉사 일행은 12월21일 부산에 도착했고 이보다 한발 앞선 조선의 통신사 일행은 이날 한성에 들어가 조정에 보고했다.

 강화가 깨지고 다시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조정은 정명원(鄭明遠)을 고급(告急) 봉문사(奉聞使)로 보내 사실을 알리고 明 지원군의 재 출동을 요청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8월1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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