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6)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6)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18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李舜臣 출동명령 불응, 西人 모함으로 白衣從軍

 해가 바뀌어 1597년 정유년(丁酉年) 선조(宣祖) 30년 전쟁 6년째의 해가 밝았다. 전쟁도 평화도 아닌 3년이 지나고 朝日간 2차전쟁 첫해가 된 것이다.

 해가 바뀌면서 1월14일 가등청정군의 선봉이 된 사생포(四生浦)에 상륙했고 공을 세워 죄를 씻기로 용서받은 소서행장군이 뒤질세라 웅천(熊川)에 상륙했다.

 1차 전쟁 첫해와 마찬가지로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조선군의 상륙 저지 작전은 없었다.

 1월12일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용감한 부하 허수석(許守石)이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잠입하여 화약고를 폭발시키고 군량 2만6천석을 불태우는 한편 정박중인 전선 20척도 불태워 버리는 큰 공을 세웠다.

 24일 조정은 또 고급사(告急使)를 명에 보냈고 2월18일 또 보냈다.

 2월이 되어 풍신수길은 다시 침공군을 편성했다.

 1번대 가등청정(加藤淸正) 1만명, 2번대 소서행장(小西行長) 1만4천700명, 3번대 흑전장정(黑田長政) 1만명, 4번대 과도직무(鍋島直茂) 1만2천명, 5번대 도진의홍(島津義弘) 1만명, 6번대 장증아부원친(長曾我部元親) 1만3천300명, 7번대 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 1만1천100명, 8번대 모리수원(毛利秀元)·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4만명 병력합계 12만1천100명.

 행장과 청청군이 상륙하기전 조선에는 釜山 1만300명, 安骨浦 5천명, 加德島 1천명, 西生浦 4천명 등 모두 2만300명의 일본군이 잔류하고 있었다.

 잔류병력을 합하여 일본군 2차 침공군 총 병력 규모는 14만1천400명이 되었다.

 풍신수길은 침공군에 14개항의 상세한 작전명령을 내렸는데 3항에 ’전라도는 빠짐없이 공략하고 충청·경기는 가급적 공략하라’고 게재했다. 전라도에 대한 그의 한은 여전했다.

 그런데 가등청정이 서생포에 다시 상륙한 직후 1월27일 조일전쟁 최고의 이변이며 조선과 조선수군 최대의 비극이 조선조정에 의해 저질러졌다.

 조정의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가 한성에서 내려워 閑山島의 3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李舜臣을 체포했다.

 이에앞서 선조가 위론사(慰論使) 황신(黃愼)을 이순신에 보내 ’1월7일 가등청정이 부산에 상륙하니 나가 치라’고 명령했다.

 일은 일본군 소서행장 진영에서 꾸며졌다. 소서행장 진영의 통역관(通事) 요시라(要時羅)가 전부터 친분이 있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 접촉하여 전쟁이 다시 일어난 것은 가등때문이라고 말하고 행장과 청정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 가등이 7일 부산에 상륙한다는 사실, 이때를 틈타 조선 수군이 나가 쳐 가등을 잡는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귀뜸해 왔다.

 김응서는 大邱에 있는 도원수 權慄에 보고했다. 권율은 장계(狀啓)로 조정에 알렸다. 조정은 그대로 믿고 황신을 급하한 것이었다.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적이제공한 정보를 고 대군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정이 상륙한 뒤 요시라가 김응서에 다시 나타나 ’청정이 부산 앞바다에 7일간이나 머물고 있었는데 조선 수군이 왜 나가서 치지 않았느냐’며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 김응서가 권율에, 권율이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이 뒤집혔다.

모함으로 압송되는 충무공 / 아산 현충사 제공

 그렇지 않아도 조정내에서 이순신이 한참 도마위에 올라 있었다.

 전투가 있을때마다 싸우기 보다 일본군 전사자 목이나 베어 전공을 위장하는데나 열중했던 원균이 이순신을 몹시 시기하다가 충청병사로 이동된후 가까운 한성 조정의 서인들을 만나 이순신을 계속 모함했다.

 이순신을 천거한게 동인 유성룡이었기 때문에 서인들이 이순신의 처벌을 주장했으며 특히 좌찬성 윤근수(尹根壽)가 극렬했다. 이순신이 당쟁의 틈바구니에 끼인 것이었다.

 조정의 출동명령을 따르지 않은것은 좋은 빌미가 되었다. 서인들이 들고 일어나 잡아오게 한 것이었다. 임금의 명령을 다르지 않은것은 사형에 해당됐다.

 선조가 의심스러워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 남이신(南以信)을 보내 조사를 시켰는데 그도 서인이었다. 이순신은 출동하지 않아 가등청정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보고했다.

 선조가 죄를 물으라 명령하여 3월12일부터 혹독한 고문이 가해다. 

 입장이 난처해진 유성룡이 벙어리가 된 가운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이 나서 ’순신은 명장이니 목숨만은 살려주어 공을 세워 죄를 씻게 해야한다’고 청하여 4월1일 죽음을 면하고 파직되어 白衣從軍케 했다. 그에게 세번째 파직이고, 두번째 백의종군이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8월12일 게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