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7)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7)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20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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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敵신화 조선수군 元均지휘 漆川梁해전서 全滅

 소서행장이 진심으로 가등청정을 잡기위해 조선에 정보를 주었는지 이순신을 잡기 위해 모략을 했는지는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았으나 소서행장은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잡고 조선수군을 전멸시키게 되었다.

 이순신은 權慄휘하에서 백의종군했다. 이에앞서 2월14일 명나라 책봉사 양방형(楊方亨)이 명나라에 들어가 경과를 보고했으며 병무상서가 石星에서 田樂(전락)으로 바뀌고 경략(經略)이 손광(孫鑛)에서 다시 형개로 바뀌었다.

 그간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했던 石星 등이 明조정에서 밀려났으며 심유경은 이해 7월 조선에서 체포되어 황제를 속이고 나라 위신을 손상시킨 죄로 사형된다.

 3월에 명의 神宗황제가 先祖에 글을 보내왔는데 다시 군사를 보내겠다는 통보와 함께 선조를 꾸짖는 치욕적인 내용이었다.

 "몇해 동안이나 휴식하면서도 군사훈련을 시키지 않아 간사한 왜군이 다시 쳐들어 오게되고 또 장황하게 글을 바쳐 天朝(明)의 구원을 바라는고. 짐(朕:明황제)이 弱少를 측은히 여기는 仁과 어려움을 구해주는 義로써 다시 군사를 보내고자 하노니. 그대 나라 君臣들도 거국 노력하여 天命(明의 명령)에 어김이 없도록 할지어다"

 5월8일 부총병 楊元이 요동(遼東)兵 3천명을 거느리고 한성에 들어와 南原으로 향했고, 6월14일 吳유충이 南兵 4천, 7월3일에는 제독 마귀(麻貴), 9월3일 경리 양호(楊鎬)가 한성을 거쳐 남하했다.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은 全州城에서 南原을 지원토록 했다.

 11월 현재 明군 총독 형개 휘하 본진 2만2천, 양호 휘하 4천, 제독 마귀 휘하 5만4천명 등 총 병력 8만여명이 되었다.

 일본군은 상륙후 성을 수축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했다.

 4월말에 도진의홍(島津義弘)군이 상륙하여 가덕도에 들어갔으며 7월중으로 2차 침공군 전군을 상륙시켰다.

 원균이 새로 통제사로 부임한뒤 이순신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해 온 閑山島의 조선수군 기지는 걷잡을 수 없이 기강이 무너져 갔다.

 이순신이 시행하던 군율(軍律)을 모두 바꾸어 버리고 이순신으로부터 신임을 받던 부하 장수들을 쫓아내고 이순신이 밤낮없이 참모들과 작전을 논의하던 운주당은 원균이 첩을 데리고 들어가 울타리를 쳐 놓고 장수들도 만나주지 않았다. 술에 취하여 부하들을 괴롭혔다.

 조정은 6월10일 從軍官 남이공(南以恭)을 한산도에 보내 일본수군 침공을 막을 계책을 세우도록 독려했는데 한산도 수군 본영의 군기가 말이 아님을 보고 도체찰사 李元翼과 도원수 權慄에 엄중하게 수군을 감독토록 했다.

 6월19일 이원익과 권율이 적의 해상활동을 견제하도록 수군에 요청했으나 원균은 육군이 安骨浦를 먼저 치라며 출전을 기피하자 남이공이 한산도로 가 원균과 함께 배에 타고 출전케 했다.

 그길로 안골포로 들어가 공격했으나 육상의 적이 대포로 공격해와 전진을 못하고 가덕도를 돌아 칠천도)漆川島:거제 가청)에 진을 쳤는데 적군의 총격에 평산포(平山浦)만호 김축(金軸)이 부상하고 보성(寶城)군수 安弘國이 전사했다.

 7월8일 일본수군 함선 600여 척이 가덕도로 이동중이었는데 원균이 경상우수사 배설로 하여금 나가치게 하고 자신은 한산도에 앉아서 지휘한다고 했다. 배설이 수배걱을 거느리고 나가 熊川을 습격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적의 육상공격을 받아 전선 수십척과 배에 실은 군량 200여석을 잃고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말았다.

 11일 곤양(昆陽:사천)에 주둔하고 있던 권율이 원균을 불러다 곤장으로 벌한뒤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도록 했다.

 부아가 난 원균이 14일 전함선을 이끌고 부산을 향했다. 조선수군의 이동은 웅천-안골포-거제-가덕도-김해-죽도 등의 일본군에 포착되어 부산 포구 600여 척의 일본수군이 만전의 응전태세를 갖추고 지켜보고 있었다.

 도중에 적선이 나타나 도전하는척 하다가 달아나기를 반복하여 조선수군을 몹시 피로하게 만들었다. 절영도(絶影島)에 이르렀을때는 날이 이미 저물고 한산도로부터 하루종일 노를 저어온 군사들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군사들 사이에 "싸우지도 못하고 죽겠구나"하는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원균이 함대를 뒤로 물려 퇴각을 시작하자 적함선 500여 척이 추격을 시작했다.

 조선수군이 죽을힘을 다해 가덕도로 와 밤을 새고 15일 거제도 영등포에 이르렀다. 적과 거리가 충분히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나무와 물을 구하려 전함을 대고 육지에 오르자 숲속에서 포성이 울리고 조총이 콩 튀듯했다.

 적이 조선수군이 이곳으로 올줄알고 미리 복병을 배치해 두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수군 400명을 잃었다. 급히 배에 올라 섬을 돌아 가까스로 칠천량(漆川梁)에 도착, 포구안으로 들어갔다. 적이 추격해 왔으나 날이 저물어 퇴각해 나갔다.

 이날밤 일본군 특공선 6척이 조선 수군 전함들 사이에 끼어 들었으나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16일 새벽이 되자 이들 특공대가 공격을 시작하여 큰 혼란이 일어났다. 곧이어 일본수군의 대규모 함대가 조선 수군을 포위하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댔다.

 피아간의 총통과 조총 불화살이 포구를 뒤덮은 가운데 칠천량 앞바다가 불바다를 이루며 무적을 자랑하던 조선 수군이 처참하게 무너져 갔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 배흥립이 차례로 전사했다.

 조선 3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元均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 소나무 밑에 앉아 있다가 적의 칼에 죽었다.

 이로써 개전이래 전선 300여 척을 격파하면서 남해 제해권을 장학한 무적의 조선 수군이 통제사 한 사람 인선 잘못으로 해전 한마당에 전멸이 되고 말았다.

 조선에는 하늘이 무너진듯한 날이었다.

 이날 해전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전함 12척을 살려 지옥의 전장을 탈출했다. 이들 12척은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재건하는 운명의 전선들이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8월1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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