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특집> 도처가 비경이요, 곳곳이 정서 순화의 고장
<광복회특집> 도처가 비경이요, 곳곳이 정서 순화의 고장
  • 백봉기
  • 승인 2020.02.06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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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주군은 전주시와 접경하면서도 전주에 부속되지 않고 오히려 그 기상이 돌올하다. 노령산맥의 지맥을 얻어 굽이굽이 산령 휘달리니 승경이 바로 완주일레라. 비봉, 화산, 운주, 고산 등 그 험하기로 개발이 더디었는데, 이는 오히려 힐링의 요람으로 인구가 늘어나는 중이다. 몇 곳 발군의 산업지대를 빼고는 살기 좋은 진경산수 그 자체다.

 이름 붙이되 완전한 고을 완주인 바, 이미 예견하여 미래를 점쳐 둔 것이다. 산악을 많이 끼고 도시에 접경하니 타 지역 사람들도 이 고장에 많이 쉬어 간다.

 그 중에서 모악산은 그대로 모악으로 다 포용하고 모두 품어 인자요산의 그 정기로 우뚝하다. 또한 대둔산은 그 수려함으로 한국 명산으로 손꼽히는 산이다. 그 정기로 독립운동 기운을 배가 시킨다

 특히 완주의 일문 구의사 이야기는 빛이 지지 않는 애국혼의 상징이다. 산이 높고 물이 깊으니 문천 무만, 문사가 천명 나고 무인이 만명 난다는 뜻일레라. 그래서인지 의로운 의진이 창의의 깃발을 먼저 들었고 저리 심산유곡에서 시대를 밝히는 문사들이 창만하였으니 이 고을을 충절과 문향의 고을이라 일컬을 만하였다.

 궁벽한 고장이라 생계도 어려운 터에 어찌 창의의 뜻을 세웠을꼬. 꽉 막힌 산천 굽이굽이 협곡인데 어찌 문화예술의 명사들이 줄곧 대를 이었을꼬, 참으로 기이한 고을이다.

 

 □ 자활자립형 의병진, 완주에 우뚝

 

 1907년 유지명 유치복 이규홍 의병진은

 독립적 의병활동 전개로 유명

 더러는 연합 전술로 일군에 타격을 입힌

 이름 높은 의혈의 진용

 친일 단체 일진회를 공격하고

 관내 비행을 응징하며

 병기는 자가 생간, 불당골에 병기 제작소를 두었으니

 자강 자립 자존의 의병진이라

 비봉면 가급재 전투, 운주산 전투, 그 전공이 혁혁했고

 자체 조달금과 독지가의 군자금 충당으로

 자유자재 의진을 운영했다

 1909년 유지명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하고

 이하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감옥살이로 영육의 아픔을 겪었다.

 

 

 □ 가금재의 전투, 유지명 등의 혁혁한 공훈

 

 유지명 유치복 이규홍 등의 의진은 1907년

 가금재 전투에서 맹렬히 왜병을 덮쳤다

 지형지물을 익숙하게 활용한

 게릴라 전법은 신출귀몰하였으니

 공동선의 의지는 파란 하늘의 깃발이었다

 의진의 장졸들 달려들어 치고 빠지며

 적 앞에 몸을 던져 왜의 기세를 꺾으니

 훈련된 정예군보다 의진의 전략은 맹렬하고 독했다

 어찌 자신의 안위를 돌보랴

 어찌 일신의 목숨만을 위하였으랴

 의진의 함성 하늘을 찌르고

 날랜 기상은 맹호 같았다.

 10일간 계속된 전투로 일병 29명 사살 의병 21명 전사

 두고두고 가금재 전투의 전략이 인구에 화자 되고

 의병장 기림의 양양은 날로 높았다.

 

 

 □ 고산의 고흥 유씨 일문 구의사의 구국 충절 기리노니

 

 한 가문에서 아홉 의사가 배출된 일은 만고에 드문 일

 하나하나 우뚝하여 태산 함께 이루니

 구의사 충혼 이름 석비에 새기며 명명하나니

 유치복 유태석 유영석 유명석 유준석

 유현석 유연청 유연풍 유연봉

 수신제가를 먼저 치국평천하를 후에

 나라가 위태로우면 나아가 싸우며

 국권 회복을 위해 살신성인하였으니

 아무나 따르지 못할 장한 집안 구의사일세

 완주 고산에 근거를 두며

 애향의 깃발이기도 하였으니

 높고 높아라 태산준령

 고개 들어 우러르노니 고흥 유씨 구의사를

 눈사태 급박하여도 청청할세

 고산준령 조선 소나무들 푸르디푸르다네

 만고 청청 소나무이려니와

 아니 그 의표는 영원한 강물일레라

 고흥 유 씨 한 가문에

 아홉 분의 의사라니

 청사에 빛나리라, 그 우둑한 충절은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푸르게 흐른다네

 목숨 던져 강둑을 텄으니

 구의사의 찰랑거리는 영혼의 숨결이려니

 맥을 터 민족 기상이 흐르게 한

 일문 구의사의 공훈 받들고 우러를진저

 완주가 완성된 고을 됨에

 구의사 있었네, 구의사 파란 의표 번뜩였네

 곧고 빼어난 일편으로 단심하는 구의사 계셨네

 

 □ 9의사 중 제1, 유치복 선생은

 을사, 정미 조약 후 의병활동에 투신

 유지명 의진에 몸담아

 동지 3인과 함께 우북면 장암에서 이화순으로부터

 군자금 30원을 조달 받았고

 미륵면(미력면) 도내리 최순표에게서 역시 15전을 받았으며

 전라 충청 일원에서 일군과 교전 전과를 크게 올렸다

 1910년에 결국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총살형에 처해 장렬히 순국하였다.

 

 □ 제2, 유태석 열사는

 완주 비봉면 유씨 일문 청년 9인은 일제 야욕 분쇄를 결의하고 유명석 유준석 등과 의진을 결성하고 익산 일대에서 군자금을 마련하고, 여산면 원수리 한흥수 집에서, 이봉승 집에서, 각 각 군자금을 모금했다. 그 후 일경에 체포되어 15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 제3, 유영석 선생은

 1907년 유현석 등 7인과 더불어 익산 여산면 원수리 노상에서 한흥수 집과 이봉승 집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 후 일경에 체포되어 10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 제4, 유명석 공은

 1907년 유현석 등 7인과 더불어 원수리에서 한흥수, 이봉승 집에서 군자금을 모았다. 1917년 체포되어 15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 제5, 유준석 선생은

 유현석 등 7인이 원수리 노상에서 한흥수, 이봉승등에게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후에 체포되어 15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 제6, 유현석 열사는

 유명석 등 9인의 의병이 되어 활약했으며, 원수리 노상에서 한흥수, 이봉승 등에게서 군자금을 모았다. 그 후 은신 중에 체포되어 12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 제7, 유연청 선생은

 1907년 유현석 등 7인과 더불어 의병이 되었다. 그 후 익산 군내에서 군자금을 모았고 원수리 노상에서 한흥수, 이봉승 등에게서 군자금을 모았다. 그 후 은신 중에 일경에 체포되어 12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 제8, 유연풍 열사는

 1907년 유현석 등 7인과 더불어 노상에서 한 흥수 이봉승 등에게서 군자금을 모았다. 그 후 은신 중에 체포되어 12년의 옥고를 치렀다.

 

 □ 제9, 유연봉 선생은

 1906년 일문 9인의 의병으로 활약했으며 원수리 노상에서 한흥수, 이봉승에게서 군자금을 모았다. 그 후 일경에 체포되어 12년의 옥고를 치렀다.

  백봉기 수필가(전북예총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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