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농부 철학자 이병은 선생
실천하는 농부 철학자 이병은 선생
  • 신영규
  • 승인 2020.02.06 13:56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복회특집>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돌아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백범 일지) 中

 올해(2019년)는 3·1운동 100주년과 해방이 된 지 74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와 싸우다 목숨을 잃은 독립 운동가는 1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보훈처에 등록돼 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은 2만 명에 불과하다. 학자들은 지금까지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애국지사보다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독립운동가가 전체의 95%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몇 개의 가명을 쓰고 일제의 검문을 피해 숨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최일선에서 활동하는 핵심 독립 운동가들의 경우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본인과 관련된 정보나 기록을 신문이나 기관지 등에 제공하지 않아 후손이나 개인이 기록물을 찾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핵심 독립운동가들 외에도 농부, 천민, 기생, 고아, 고등학생 같은 사람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이중 1877년 전북 완주군 구이면 두현리에서 태어난 이병은 선생 또한 가난한 농부였다. 이병은 선생은 조희제 선생이 1895~1918년까지 애국투사들의 절의 실적을 모아 전기체로 서술한 염재야록(야사집)의 발문을 쓰신 분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발문을 쓴 선생은 임실경찰서로 연행되어 모진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염재야록은 당시 의병운동사와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병은 선생이 가장 중시했던 것은 의리에 중점을 두고 자강을 모색하는 것이었고, 농사와 독서는 그 실천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도덕적 인격을 향상시키라는 ‘위기지학’의 가르침을 따라 학문에 전념하신 농부 학자였다. 특히 선생은 자신의 아버지가 임종할 때까지 병환을 끝까지 돌보는 효행이 지극한 분이셨다.

 1931년 일제가 전주 향교를 개방하고 유흥가로 만들려고 수작을 부리자 이병은 선생은 전주 향교 뒤 이목대 아래로 이사하고 남안재를 옮겨 학문연마와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그는 어떻게든 유교문명이 일제에 의해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전주 향교의 문묘 위패를 다시 제작하고 소장도서와 제기 등을 보존하여 유학의 기풍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유교 진흥을 위한 그의 노력은 광복 후에도 지속되었다. 1949년 향교 문묘의 위패를 없애려는 움직임이 있자 정부에 강력하게 탄원하여 전주 향교를 지켜냈으며, 6.25 전쟁 때는 북한에 의하여 버려진 위패를 지켜내고 없어진 것을 다시 제작하는 등 민족혼을 지켜 내는 정신적 지주였다.

 이병은 선생은 맑은 심성과 밝은 지성을 가진 주경야독의 선비였다. 심성을 기르는 방법은 책에 있고, 구제를 기르는 방법은 경작에 있다고 믿어 독서와 농사를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를 하였기에 그 누구보다도 생계의 필요성과 농민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공부하러 모여든 문인들에게는 스스로 농사를 짓도록 하였고, 농사일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도리라고 여겼다.

 이병은 선생의 가르침은 조선인의 도덕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정책에 저항하고, 물질에 빠져 유교의 도덕적 가치가 사라져 가는 세상을 향한 외침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한 선생은 자주적 삶을 실천한 농부 철학자였다.

 독립 운동가들은 당시 옥살이나 태형 등 모진 고초로 인해, 몸과 마음은 모두 망가지고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기 어려우니 살림은 점점 기울고, 하루하루 근근하게 삶을 연명하다 보니, 자식들에게는 기본적인 교육의 기회조차 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 가난의 대물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축적한 부와 지위는 아직까지 건재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이 나올 법도 하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은 외면당하고, 자신의 안위만 추구한 이들은 호의호식하는 곳.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헬조선’이라 부른다. 이 땅이 ‘자랑스러운 조국, 지켜야 할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기억돼야 할 사람들과 응당 비난 받아야 될 사람들을 가려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그 출발점에 “잊힌 영웅들, 독립운동가”가 있다.

 우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 예우를 다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안보가 위태로울 때, 누가 그들처럼 목숨을 걸고 나라와 우리 가족을 위해 싸울까. 보훈처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독립유공자들을 발굴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독립 운동가들은 무엇을 위해 투쟁했는가. 독립은 누구를 위한 독립이며 투쟁이었나. 조국이란 무엇인가. 이름 없이 스러져간 독립 운동가들을 위한 진혼곡이라도 울려야겠다.

 신영규 시인·수필가(전북수필가비평작가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진한 2020-02-06 15:41:47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가 옳음.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최고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원)이 승계.한국의 Royal대는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성대 다음 국제관습법상 학벌이 높고 좋은 예우 Royal대학. http://blog.daum.net/macmaca/2575
윤진한 2020-02-06 15:41:04
일본은 막부시대 불교국이되어 새로생긴 성씨없는 마당쇠 천민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불교 Monkey나라.일본 신도는 천황이 하느님보다높다고 주장하는 신생 불교 Monkey임.한국은 헌법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보장되어, 일본에 선전포고한 상태가 지속되는 나라임.생경하고 급격하게 새로 생긴 마당쇠 천민 천황이 세운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에 남겨진 패전국 일제 잔재며, 마당쇠 천민 학교며, 부처 Monkey.일본 Monkey를 벗어날 수 없는 불교.일본Monkey 천민학교로, 한국 영토에서 축출해야 되는 대상임. 한국 영토에 주권이나 학벌같은건 없이 대중언론에서 덤비며 항거하는 일제 잔재에 불과함.

http://blog.daum.net/macmaca/2632
윤진한 2020-02-06 15:40:01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가 유교도임. 주민등록에 조선성명인 한문성씨와 본관을 의무적으로 등록해야 하는 나라. 중요한것은 동아시아 유교국가(중국,한국,베트남,몽고. 그리고 2차대전이후의 대만.싱가포르 및 전세계 화교들)에는 하느님(天),계절의 신,산천의 신,조상신,공맹숭배,한문성씨.본관, 한자,삼강오륜,인의예지신,충효,관혼상제,한자,명절이 수천년 체화된것.




한국은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나라.불교는 한국 전통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후발 국지적 신앙인 일본신도(새로 만든 일본 불교의 하나).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일본항복으로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 없음.

부처는 브라만교에 대항해 창조주를 밑에 두는 무신론적 Monkey임.일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