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들의 우울한 명절
꼰대들의 우울한 명절
  • 이흥래
  • 승인 2020.01.28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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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설엔 모처럼 온 가족이 편안히 모여서 떡국을 먹었다. 딸은 사위와 함께 연휴 전에 내려왔고, 아들도 운 좋게 연휴가 시작되던 날 늦게나마 내려올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까칠한 아들녀석도 그렇지만 백년손님인 사위가 온다기에 아내는 연휴 며칠 전부터 몇가지 지시사항(?)을 명토 박듯이 다짐시키곤 했다. 오빠이면서도 장가 못 간 아들녀석에게, 애비는 네 나이에 너희를 모두 낳아 일가를 이뤘는데 아직도 장가 못가느냐고 잡들이지 말라는 것이 첫번째 지시사항이었다. 또 술을 잘 못하는 사위에게 술 한잔하자고 절대 하지 말라는 건 두번째였고,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와 횡설수설하지 말라는 건 세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말씀이었다. 아, 사위란 놈이 술 잘마시는 장인한테 술 한잔 먼저 대접하는 건 기본이자 도리가 아니냐고 큰소릴 쳤지만, 명절에 밥 한술이라도 편하게 얻어 먹으려면 조심하는 수밖에 없겠다며, 나름대로 상당히 근신에 근신을 거듭했다. 하지만 아내는 애비라는 작자가 명절에 아이들 데리고 처가에 가서 동서들과 밤늦게까지 노느라, 임신한 딸아이가 무척 피곤했다는 등, 그 여파로 A형 독감에 걸렸다는 등, 애들이 돌아간 지금도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과거와 다르게 요즘엔 명절만 되면 남성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든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갈수록 명절 보내기가 참 불편하다. 방송을 보아도 명절에 남성들은 모두 먹고 놀기만 한다는 투이고, 여성들은 음식 장만에, 아이들 돌보느라 노동강도나 피로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불편한 뉴스뿐이다. 또 여러 매체가 명절에 자녀나 친척들에게 절대 해서는 안되는 얘기며, 가족간 다툼을 피하는 방법 등 여러 얘기를 경쟁적으로 내놓는데, 이게 대부분 남자 들으라는 얘기다. 이번 설에도 어느 신문을 보니까 문재인, 황교안, 조국, 유시민, 윤석렬, 추미애, 진중권 등 7명을 설 대화의 7대 금기인물로 정하고 ‘설 평화’를 위해 입 좀 다물라는 친절한 기사까지 실려 있었다. 나 역시 아내의 강력한 주문도 있고, 별 내키지도 않아서 아이들과 부딪힐 일은 없겠거니 했는데 의외의 간단한 문제로 하마터면 설 평화가 위협받을 뻔했다.

 설 뒷날 아이들과 함께 아점을 먹으러 음식점에 갔는데 우리처럼 아점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30여분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무료하기도 해서 마침 TV에 나온 성전환 군인의 복무연장 문제에 대한 의견을 가볍게 아이들에게 물었다. 질문 끝에 나는 하사관 모집 요강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자격요건이 변경됐으면 전역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딸과 아들녀석은 내 의견에 대뜸 토를 달고 나섰다. 성별만 바뀌었다고 근무성적도 좋은 군인을 쉽게 내쳐서야 되겠느냐, 여군들이 같이 근무하는 걸 싫어하는지 국방부가 언제 조사를 했느냐는 등 언성이 높아지면서 내 의견은 일언지하에 타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졸지에 꼰대가 돼버린 내가 반론을 채 펴기도 전에, 당장 그만두라는 아내의 지엄한 분부로 언쟁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애비 신세가 참 우습게 돼 버렸다는 곤혹스러움을 떨치지 못했다. 아점을 마치고 아이들과 처가에 갔는데, 우연의 일치치곤 묘하게 처제도 바로 그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게 아닌가. 하지만 주방에서 그 소리를 들은 아내가 득달같이 달려와, 또 그 얘기냐며 일갈하는 바람에 나와 아이들 모두 대답도 하지 못했고, 질문자인 처제도 무안해해서 분위기만 서먹해지고 말았다. 물론 아내는 행여 언쟁으로 번져 기분 좋은 명절 연휴 분위기가 깨질 것을 우려했겠지만, 언로가 막힌 씁쓸함이 쉽게 가시진 않았다. 명절이라지만 돈 씀씀이도 줄어들고, 말문도 막히고… 꼰대들에게 이젠, 명절이 갈수록 재미가 없다. 아, 옛날이여!

 이흥래<전라북도 체육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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