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9)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9)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02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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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과 日本 사이 가짜使臣들 오가며 平和회담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격하여 조선전역을 석권하다시피했고 명나라를 코앞에 둔 마당에서 풍신수길이 일본군을 철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심각한 병력부족과 군수지원의 곤란때문이었다.

 병력부족은 개전 첫해부터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 장령들은 판단하고 있었다.

 한성 점령후 5월26일 모리휘원(毛利輝元)은 풍신수길에 "현재의 병력으로 조선을 다스리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명나라 진공도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띄운바 있었다.

 그는 일본군은 1년 사이에 절반 가까운 병력손실을 보았으며 평양까지 1천700리에 걸쳐 길게 늘어진 후방보급로 경비에도 급급했다. 명나라 진공은 커녕 조선의 점령통치도 불가능 했으며 점령통치는 커녕 그대로 조선 영토내에서 어물거리고 있다가는 침공군 전군이 전멸하게 될는지도 모를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3월3일 한성에서의 17將회의에서 이들은 ’남해안 부근 군량보급이 용이한 곳에 성을 쌓고 재편성’하는게 현명하다는 결론을 맺었고 이에앞서 본국의 풍신수길이 같은 판단을 하고 철퇴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수길의 고충은 조선 현지의 이같은 심정에 그치지 않았다. 본국에서의 병력징발도 순조롭지 못했다. 정한위략(征韓偉略)에 ’수길이 모리수원(毛利秀元)으로 하여금 군사 2만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게 하려고 군사를 징발하려 했으나 京都경비와 명호옥(名護屋) 주둔병력 밖에 더 징발할 수 없어 불행하게도 작은 나라에 태어나서 병력이 부족하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랴며 탄식했다’고 한다.

 선박도 크게 부족했으며 설사 선박이 있다해도 일본 수군의 활동범위는 겨우 대마도와 부산 사이였다. 남해 제해권은 조선 수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조선에 침공한 일본군 병력 손실에 대해 본국에서 계속 중원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어떻든 명나라는 물론이고 조선 전역의 점령통치마저도 병력 부족으로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부산을 중심으로 남해안 12개 본성과 6개 지성으로 바다를 배경으로 배수진을 친 방어군이 되고 말았다.

 5월9일 소서행장(小西行長)은 한성 철군때 동행해온 明나라 삼장(參將) 사용재와 유격장 서일관(徐一貫) 그리고 석전삼성(石田三成) 등 일본군 장령과 함께 부산을 떠나 16일 명호옥(名護屋)에 도착했다. 사용재와 서일관은 명나라 장수에 불과했으나 심유경(沈惟敬)이 일본군 철군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정에서 보낸 사신으로 꾸며 보냈다. 가짜 사신이었다. 심유경은 부산에 남았다.

 풍신수길은 이들을 몹시 반겼으며 각별히 대접했다. 그도 강화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24일 명호옥에서 풍신수길이 이들 가짜 사신드을 접견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한편 푸짐한 선물도 주었다. 실컷 놀고 대접 받은뒤 6월28일 명나라 사신이 명호옥을 떠날때 전문 7조의 구화약관(구和約款)을 받았다. 맹랑한 내용으로 요지는 다음 과 같았다.

첫째, 화평의 인질로 명나라 황제의 현녀(賢女:皇女)를 일본황제가 후궁으로 맞는다.

 둘째, 관선(官船)과 상선(商船)이 왕래케 한다.

 셋째, 두나라 전권대사가 서로 서약서를 교환한다.

 넷째, 조선 8도중 4도만 조선국왕에 주고 나머지 4도는 일본이 차지한다.

 다섯째, 조선의 왕자와 대신 한 두명을 인질로 일본에 보낸다.

 여섯째, 이미 포로가 된 조선의 두 왕자는 돌려 보내준다.

 일곱째, 조선국왕의 책임있는 대신이 앞으로 위약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쓴다

 라는 것이었다.

 이런 맹랑한 풍신수길의 조건을 휴대한 명나라 가짜 사신들이 7월15일 부산에 도착하여 22일 석방된 조선의 두 왕자와 함께 한성으로 출발했다.

 소서행장과 석전삼성은 이들에 앞서 6월2일 부산으로 귀환하여 진주성(晋州城) 공격전에 참전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부산데 도착하기전 7월8일 소서여안(小西如安) 등 일행 35명을 약관사(約款使)라는 이름으로 심유경과 함께 한성으로 올려 보냈다.

 이들은 8월30일 한성을 떠나 명나라에 들어갔으나 조선이나 명나라 조정이 들어 줄 턱이 없는 7개 조항을 내밀지도 않았고 ’허공(許貢:일본의 조공을 받아줌) 허봉(許封:이본국왕을 王으로 책봉하여 일본을 승인함)’의 화의(和議)만을 요청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29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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