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1)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1)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06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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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유경 秀吉의 가짜 항복(降伏)문서 갖고 明황제 속여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서로 들어줄 수 없는 맹랑한 조건을 내걸고 가짜 사신이 오고가는 사이에 일본군 주둔 남해안 지역에서 산발적인 국지전투가 있었다.

 9월29일 창원주둔 소서행장군 일부가 咸安의 농촌에서 조선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수확기 농작물을 거두게하여 약탁하고 있었다.

 의령(宜寧)에 주둔하고 있던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가 출동하여 이들을 공격했으나 선거이가 부상 당하는 등 되레 패퇴했다.

 같은날 고성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장 崔강군이 金海쪽으로 행군하다가 웅천(熊川)북방 안민령(安民嶺)에서 김해로부터 웅천쪽으로 행군해 오던 과도직무군(鍋島直茂軍)과 맞닥뜨렸다. 쫓고 쫓기는 혼전끝에 조선군이 승리하여 패주하는 적을 추격했다. 崔강은 이 전투의 전공뿐아니라 그뒤 산발적인 전투에서 모두 이겨 가리포(加里浦) 첨사가 되고 다시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다가 경상도좌수사(慶尙道左水使)까지 벼슬이 올랐다.

 10월25일 전쟁 발발후 피난길에서 이산해(李山海)의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가 하룻만에 파직되었으나 줄곧 피난 조정의 일원으로 전쟁지도에 참여했으며 뒤에 도예찰사(都禮察使)가 되어 명군의 조정과의 관계 조정등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던 유성룡(柳成龍)이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후 자신의 체험과 각종 자료를 근거로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여 전쟁기록을 남겨줌으로써 후세인들이 이 전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가을이 되면서 일본군의 수확 농작물 약탈이 계속 되었다.

 10월27일 웅천성에서 나온 일본군이 진주땅 영선(永善:고성군 영현면)에서 농민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순변사 李빈이 충청도 조방장 趙希仁군을 출동 시켰다.

 조희인이 이들을 공격하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10월30일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모리수원(毛利秀元) 복도(福島) 정칙(正則)軍 일부가 일본으로 철수했다.

 12월2일 서생포(西生浦)의 가등청정군 일부가 경주성 북쪽 안강(安康)에 침입하여 양곡창고를 털었다.

 경주성에는 조선군 도원수 권율(權慄), 明군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참장 낙상지(駱尙志)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한달전 11월23일 경상병사 고언백, 永川군수 겸 조방장 홍계남, 경상방어사 권응수(權應銖), 조방장 이수일(李守一) 등이 안강을 지키고 있다가 일본군 기습에 패해 조정으로부터 문책을 받은바 있었다. 이해에는 윤달(閏月)이 있어 11월이 두번이었다.

 고언백과 판관 박의장(朴毅長)이 출동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경주의 명군 오유충 왕필적과 낙상지가 수천명을 거느리고 뒤따라 출동하여 격전끝에 적을 쫓았다.

 이후 해상에서는 4차의 해전이 있었으나 육상에서는 서로 대치하는 가운데 이렇다할 전투없이 3년간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서로 속고 속이는 강화회담이 계속되었다.

 해가 바뀌기 전 12월18일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죽었다. 정철은 전라도 창평(昌平)사람으로 개전전해 정여립(鄭如立)사건때 좌의정으로 西人의 영수가 되어 東人을 철저히 탄압했으나 세자책봉 문제로 선조의 미움을 사 귀양갔다가 전쟁이 터진뒤 경기 충청 전라 3도 예찰사(禮察使)가 되어 활약했고 明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온뒤 물러나 강화도(江華島) 송정촌(松亭村)에 머물러 살았었다. 그는 같은 전라도 海南출신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우리나라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쌍벽으로 더 유명했으며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해 연말 무렵의 일본군 잔류 병력은 4만3천여 명이었다.

 서생포城 및 支城 : 가등청정 6천400명

 임낭포城 : 모리길성 2천500명

 기장城 : 흑전장정 2천명

 부산 동래 및 支城 : 길천광가 5천명

 김해城 : 과도직무 6천명

 안골포城 : 협판안치(脇坂安治) 700명

 가덕도城 : 임화통호(立花統虎) 2천800명

 웅천城 : 소서행장 1만2천100명

 거제도城 : 도진의홍(島津義弘) 8천명

 해가 바뀌어 1594년 宣祖 27년 甲午年이 되었으며 전쟁이 3년째로 접어들었다.

 웅천(熊川)에서 심유경과 소서행장이 아무리 머리를 짜보아도 明나라 조정이 요구하는대로 풍신수길의 항복문서를 받아내는 일은 불가능 했다. 가짜 항복문서를 만들기도 했다.

 ’日本 관백(關白) 臣 秀吉은...’으로 시작되는 이 항복문서는 군사를 일으켜 조선에 출병하게 된 경위를 구구이 변명한뒤 일본의 조공을 받아주고 일본 국왕을 번왕(番王:토후국왕(土侯國王))으로 책봉해 주면 천년을 변치않고 明의 천황을 받들겠다’는 내용이었다.

 심유경이 가짜 항복문서를 갖고 일본인 12명을 데리고 1월20일 웅천을 떠나 2월7일 한성에 들어와 있다가 北京을 향해 떠났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29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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