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6)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6)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24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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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대군으로 진주성(晋州城) 공략에 몰입하는 풍신수길
진주성전도 / 부산시립박물관 제공
진주성전도 / 부산시립박물관 제공

 일본과의 강화를 위해 明군이 조선군의 추격을 한사코 막아줌으로써 아무 희생없이 한달 가까운 행군 끝에 밀양(密陽)이남으로 철수를 완료한 일본군은 곧바로 진주성(晋州城)에 대한 대규모 공격 준비에 착수했다.

 일본군이 숨도 돌릴 겨를 없이 진주성 공격준비에 나선 것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의 불같은 호령 때문이었다.

 전군을 철군시키는 마당에서도 풍신수길은 진주성과 전라도 공략에 실패했던 일이 가장 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풍신수길은 철수중인 일본군에 무려 다섯차례에 걸쳐 진주성 공격과 전라도 진공을 명령했다.

 2월27일자 명령서에 철군과 동시에 진주성 공격을 명령했고 4월11일 한성 출퇴를 준비중인데 수길이 명령서를 또 보내 부산 철수 즉시 진주 공격과 전라도 진격을 명령하는 한편, 상세한 작전요령과 함께 특히 진주성을 함락하면 성안의 ’조선 사람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도살하라’고 명령했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함경도에서 철수하여 보고서를 띄우자 4월17일에 도착한 회신에서 수길은 같은 명령을 또 내렸다. 5월15일과 20일에 수길은 또 다시 같은 명령을 내리고 각 부대별 동원 병력을 지시했는데 총 병력 합계가 무려 12만2천600명에 이르렀다.

 진주성 공격과 전라도 진공에 풍신수길은 거의 미쳐 있었다. 통상적인 군사작전을서는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수길은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격하고서도 침공 1년만에 부산으로 철군하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이 지난해 10월 1차 진주성 공격 실패와 전라도 진공좌절에 있었다고 판단하고 전일본군을 동원해서라도 진주성을 공파하고 전라도를 점령함으로써 떨어진 위신의 회복과 전세 만회의 돌파구를 뚫으려 했던 것 같다.

 城 하나 공격에 10만 대군을 동원하고 이를 극비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전개하는 것은 군사작전의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수길의 작전의도는 적중했다.

 상식을 벗어난 작전에 朝·明연합군은 기가 질려 아예 속수무책이 되어버려 공성(攻城)작전중 외부의 지원을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뿐만아니라 이 고립무원의 작은 晋州城은 10여일간이나 10만대군의 맹공을 견디어 냈다.

 만일 수길이 2만 내지 3만명 정도 상식선의 병력을 동원했더라면 공성작전중 朝·明연합군의 외부 증원이 있었을 것이며, 또 성을 함락하는데도 실패, 1차 공격전의 재판이 되었을 것이다.

 대군이 떠나고 난뒤 진공상태가 된 부산지역 배후를 기습하여 판세를 바꿀수 있었는데도 연합군 수뇌진은 그마저 포기하고 끝내 수수방관하고 말았다.

 明軍의 현지 사령관인 부총명 劉정이 가능청정에 편지를 보내 "만일 진주성을 치면 백만대군으로 일본군을 전멸시키겠다"고 협박했고,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있던 심유경(沈惟敬)이 공격 중지를 소서행장에 요청했으나 소서행장이 ’대항하지 말고 성을 비워 놓는게 상책’이라 하여 심유경이 이를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金命元)과 경상도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에 전했다.

 6월 초, 진주성 공격군이 편성됐다. 제1대 가등청정(加藤淸正) 2만5천624명 제2대 소서행장(小西行長) 2만6천182명 제3대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1만8천822명 제4대 모리수원(毛利秀元) 1만3천600명 제5대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8천744명 등 총 9만2천972명.

 제1대 가등청정군은 진주성 북면, 제2대 소서행장군은 서면, 제3대 우희다수가군은 동면, 그리고 제4, 제5 모리수원과 소조천융경군은 예비대로 진주성 북쪽 고지 일대에 포진하고 성의 남쪽 南江쪽에는 따로 제대 길천광가(吉川廣家)가 약간의 병력을 거느리고 지키도록 했다.

 이밖에 수군 8천250명이 동원됐고, 부산에는 지난해 9월 병으로 죽은 우시수승(羽柴秀勝)軍 1만2천명, 상주(尙州)와 부산 사이에 궁부장희(宮部長熙)의 6천명 등을 남겨 경비하도록 했다.

 한편, 심유경의 통보와 일본군의 움직임을 보아 적군의 대규모 진주성 공격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朝·明연합군은 오히려 그로인해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동원 병력 규모가 城 하나를 치는 것으로는 너무 대군이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2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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