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7)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7)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26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주(晋州)는 호남(湖南)과 순치(脣齒)...4천 전라의병 사수전
진주성 내성 / 부산시립박물관 제공
진주성 내성 / 부산시립박물관 제공

  천하의 용장 전 경상우도 의병장 성주(星州)목사 곽재우(郭再祐)가 순변사 李빈의 진주성 방어전 참전 명령에 불복하고 정암진(鼎巖津) 방어를 고집했다. 적군의 규모로 보아 진주성 방어는 불가능 하고 부하 군사만 희생시킨다는 것이었다.

 5월 중에 조정은 개전이래 조선군 총사령관을 맡아 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공조판서(工曹判書)로 돌리고 전라감사로 전라도를 지켰을 뿐 아니라 행주(幸州)에서 대승을 거두고 한성 수복의 선봉이 되었던 육군의 영웅 권율(權慄)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으며 전라감사에는 황해도 연안성(延安城) 전투의 영웅 李정임을 임명했다.

 6월5일 김명원으로 부터 조선군 총사령관을 넘겨받은 권율이 순변사 李빈,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와 함께 함안에 주둔하고 있었다.

 明軍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영·호남에 주둔하고 있는 명군에 진주성 응원을 명령했으나 이들도 일본군세가 너무 강대하다며 남원의 명군이 구례(求禮)로 이동했을 만큼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경락 송응창(宋應昌)이 소서행장에 편지를 보내 진주성 공격 중지를 요청했으나 ’임진년 진주성 공격 때 일본군 전사자가 너무 많아 관백(關白:풍신수길)이 원한을 갚으라는 명령’이라며 거절했다.

 6월15일 金海와 昌原에서 일본군 대군이 진주로 출진하여 선봉이 도원수 권율, 순변사 李빈, 전라병사 선거이 군을 깨고 함안(咸安)을 짓밟고 18일에는 정암진의 곽재우군을 밀어내고 개전이후 최초로 선영(宣寧)땅을 밟았다.

일본 대군의 기세에 눌려 조·명 연합군은 각기 뒤로 빠지며 대세를 관망할 따름이었다.

진주성에는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과 판관(判官) 성수경(成守璟)이 있었으나 함안에서 전 전라의병장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전 전라右병장 경상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전 전라도 동복(同福)현감 충청兵使 황진(黃進) 전 전라左의병부장 사천(泗川)현감 장윤(張潤) 전 전라의방장 故 고경명(高敬命)의 아들 복수의병장 고종후(高從厚) 그리고 거제(巨濟) 현령 김준민(金俊民) 金海부사 李宗仁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있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전라도 의병장들이었다. 이종인도 全州사람이었다.

 이들은 ’진주(晋州)와 호남(湖南)은 순치(脣齒(입술과 이빨)의 관계다. 호남을 지키기 위해 진주를 지켜야 한다’며 晋州전투에 뛰어 들었다. 성안의 창고를 돌아보니 군량도 넉넉했다.

 김천일과 최경회가 "성은 높고 험하며, 군량이 족하고 기계(火器)가 많으니 죽어서 보람이 있는 곳이로다"며 결사전의 투지를 다졌다.

 晋州城 수비군의 병력 규모가 얼마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록에 나타난 것으로 김천일군 500, 최경회군 600, 황진군 700, 장윤군 300, 고종후군 400, 기타 의병군 900명으로 모두 3천400명이며 이 전투에서 ’성안의 死者가 6만’이라는 기록과 전투가 10일간 계속된 사실로 미루어 서예원(徐禮元)의 관군과 성안의 장정 등 5천 내지 1만여명 전후가 직·간접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19일 일본군이 진주성 가까이 다가섰으며 이날 선거이와 경기조방장 홍계남(洪季男)이 성안으로 들어와 "물러났다가 뒷날을 기약하자" 했으나 듣지 않자 물러갔다.

 이날 상주(尙州)주둔 명군 부총명 왕필적(王必迪)과 목사 정기용(鄭起龍)이 성안으로 들어와 명군 선봉이 함양(咸陽)에 왔다며 응원할 뜻을 전하고 돌아갔다.

 20일 적의 선봉 기마대 200기가 마현봉(馬峴峯)에 나타났으며 성중에서 복수의병부장 오유(吳有)와 적개의병부장 李체가 나가 적진을 정찰하고 돌아오면서 일본군의 목을 말안장에 꿰어차고 왔다.

 21일 적의 본진이 성을 세겹으로 에워싸고 대치했다. 일본군은 성의 서북쪽 호(濠)의 물을 빼고 흙으로 메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22일 게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