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3)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3)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1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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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명군·冬將軍 반격, 日軍 손실률 커져

   2천3백여명이 지키고 있는 행주산성(幸州山城)을 3만의 대군으로 들이쳤다가 격퇴된 한성의 일본군은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2월29일에는 함경도의 2번대 가등청정(加藤淸正)군이 모두 한성으로 철퇴해 왔다.

 군사들의 몰골이 초췌하기 그지 없었다. 헐벗고 쇠약해져 있었음 상당수가 부상을 입고 있었고, 병들어 있었다. 가등청정과 함경도로 진격했다가 철퇴한 과도직무(鍋島直茂)의 군승(軍僧) 시탁(是琢:세타쿠)은 그의 일기에 "콩과 콩삶은 물만 먹었다. 하늘과 땅은 온통 빙한(氷寒)세계였다. 2월11일 함흥(咸興)을 떠나 한성을 향하여 가는데 눈이 무릎까지 빠져 전진 할 수가 없었고 금강산(金剛山)을 지나는데 山인지 눈인지 알 수없고 사람과 말이 모두 얼어 죽었다(凍殺)"고 그 참상을 기록해 놓았다.

 총사령관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한성에 집결한 일본군의 머릿수를 세어 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북진때 군사의 절반 정도밖에 살아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가장 혹심한 손실을 입은게 선봉을 서 평양까지 진격했던 소서행장(小西行長)의 1번대였다. 조선에 상륙했을때 1만8천7백여명이었던 병력이 점호 결과 6천629명이었다. 무려 1만2천71명이 없어진 것이었다. 손실률이 64.5%에 이르렀다. 부산(釜山)상륙때 정발(鄭撥)의 부산성전(釜山城戰), 송상현(宋象賢)의 동래성전(東萊城戰)과 신립군(申砬軍)과의 충주전(忠州戰)때 병력 손실 이후는 큰 손실이 없었는데 1·2차와 특히 3차 평양성 전투에서 결정적인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손실이 큰 부대는 한성 주둔 우희다수가의 8번대였다. 한성 경비의 사령부 병력인데도 손실이 컸던것은 독성산성(禿城山城)과 행주산성 등 주로 권율군(權慄軍)과의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었던 것 같다. 1만명의 상륙군 중에서 4천648명을 잃고 5천352명이 살아남아 손실률이 46.5%였다.

 함경도로 진격했던 2번대 가등청중군은 2만2천명(실제 2만2천8백명) 가운데 8천864명을 잃고 1만3천136명이 돌아와 손실률 40.3%였다. 북진때 임진강(臨津江)에서 조선군 총사령관 김명원(金命元) 방어군과 부딪쳐 병력 손실을 입은 뒤 함경도에서의 크고 작은 전투 손실과 함께 혹독한 추위로 얼어죽은 동사(凍死) 손실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까지 진격했다가 황해도로 진출한 3번대 흑전장정군(黑田長田軍)도 1만1천명 가운데 7천321명만이 살아남아 3천679명 33.4%를 잃었다.

 전라도 진격에 끝내 실패했던 6번대 소조천강경군(小早川降景軍)도 1만5천7백명 가운데 9천552명이 생존하여 39.1% 6천148명을 잃었다. 경상도에서 곽재우(郭再祐)의병군과 전라동서 권율군 및 조헌(趙憲)의병군과의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1593년 3월20일 현재 한숭에 집결한 일본군 총 병력은 기타 소규모 부대를 포함하여 5만3천명이었고 주력 부대의 병력 손실률은 44.7%였다.

 한성 이북뿐 아니라 이남의 경기, 충청도지역 보급로 경비병력과 경상도지역 일본군도 대규모로 봉기한 의병군과 재편성한 관군에 의해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병력 손실이 계속 되었고 제1차 진주성 전투 등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따라서 한성 집결 일본군 주력부대의 병력 손실률을 기준으로 개전 초기 조선에 상륙한 15만8천7백명의 병력 손실을 추정한다면 개전 1년동안의 일본군 손실은 약 7만여명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7만여 병사들을 조선 전역의 산야에 백골(白骨)로 버린채 이제 이들 일본 침략군은 쳐 올라오던 길을 되돌아 참담한 패주의 길을 걷도록 강요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3월3일 우희다수가는 한성에 집결한 17將軍들과 회합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결론을 맺고 풍신수길(豊臣秀吉)에 정세를 보고했다.

 ①한성의 군량은 죽을 먹을때 4월11일까지 지탱할 수 있다.

 ②부산에서의 군량 수송은 10일이 더 걸리며 육로와 수로 모두가 어렵다.

 ③현재 한성으로 전 병력이 집결중이기 때문에 수만명 정도의 明軍 공격은 방어가 가능하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15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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