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5)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5)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21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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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군 추격 明軍이 방해, 패주 日軍 유람하듯 행군
유성룡 표준 영정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유성룡 표준 영정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1일 유성룡이 이여송에 다시 추격전을 주장했다. 이여송이 한강의 부교를 일본군이 건넌뒤 불태워 버려 배가 없다고 핑계를 댔다. 유성룡이 충청, 경기 水使를 동원, 50여 척의 배를 찾아 냈으나 22일 이여송이 다시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추격금지령을 핑계 댔다.

 한강변에서는 뒤이어 도착한 순변사 이빈군(李賓軍)과 방어사 고언백군(高彦伯軍)의 도강을 사대애(査大愛)의 명군이 가로 막았다.

 조선군의 추격을 명군이 한사코 방해하고 있는 사이에 일본군은 하루 30리~40리씩 남하하면서 주변 군현을 불지르고 약탈했다.

 한성에서 출발할때 한성 안팎의 조선 백성들 가운데 가수(歌手)와 재인(才人), 악공(樂工), 미녀(美女)드을 납치, 행군중에 생황(笙篁:조선 관악기:많은 죽관을 통에 꽂아 명랑한 화음을 냄)을 불고 북을 치며 유유낙낙하게 남하했다.

 휴식하거나 야영을 할때에는 조선인들을 춤추고 노래 무르게 하며 오락회도 가졌다.

 세계 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희한한 패주 행렬이었다.

 철수군은 5월10일에 경상도 상주(尙州), 12일 선산(善山)과 인동(仁同), 15일 대구(大邱)와 청도(靑道)를 통과하여 밀양(密陽)에 도착했다. 도중의 수비군들도 철수군의 통과를 뒤따라 밀양 북쪽지역의 전 일본군 철퇴가 완료되었다.

 1년1개월만에 일본 침공군은 개전때의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일본군이 철수하면서도 끝내 두 왕자를 돌려 보내지 않자 5월2일에야 경략 송응창이 이여송에 추격을 명령했고 조·명 연합군의 선봉이 6일에야 한강을 건너가 시작했다. 일본군 선두가 조령(鳥嶺)을 넘어 경상도로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여송도 주력을 이끌고 선봉을 뒤따라 조령을 넘고 문경(聞慶)에 이으러 영남과 호남의 전략 요충에 명군을 배치했다.

 부총병 유연군을 대구에 주둔, 통합지휘케 하고 부총병 오유충군(吳惟忠軍)을 선산에, 부총병 조승훈(趙承訓)군을 거창에, 부총병 사대애군을 전라도 남원과 전주사이에 주둔케 했다.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은 선산에 위치하여 순변사 이빈군을 선녕(宣寧)에, 전라감사 권율군을 함안에, 전 전라의병장 창의사 김천익군과 전 전라도 동복현감 충청병사 황진군, 전 전라의병장 경상우병사 최경회군을 진주에, 전 경상우도의병장 성주(星州)목사 곽재우군을 정암진(鼎巖津)에 각각 배치하고 전라병사 선거이군, 전라방어사 이복남군, 전라의병장 임계영군, 순천부사 강희포군, 경상도 조병장 홍수남, 조환군 그리고 전 경기방어사 경상좌병사 고언백군 등은 상황에 따라 기동 배치했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이 철군할 기미를 보이자 조정은 선전관 채진(蔡津)과 송세걸(宋世傑) 등을 전라좌수사에 보내 이순신(李舜臣)에 부산 일대 적 수군을 공격하여 배들을 불태움으로써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2월6일 이순신은 개전 이후 다섯번째 좌수영 전군을 출동시켰다. 제5차출동은 가장 장기간의 출동인데 반해 가장 전과가 적은 해전이어서인지 출동함대 규모 등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7일 견내양(見乃梁)수역에서 원균(元均)의 경상도 수군과 합세했고 8일에는 전라우수영 이억기(李億祺)군이 합세했다.

 9일은 종일 비가 와서 움직이지 못했고 10일 능천(熊川)땅 웅포에 다다라 적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두번이나 유인했으나 공격이 어려운곳에 정박해 둔채 꼼짝을 하지 않아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11일 비가 와 영등포(永登浦)뒤 소태포(蘇泰浦)에서 보내고 12일 아침 3도수군이 웅포로 다시 쳐들어 갔으나 상황은 같았다. 거제(巨濟) 칠천도(漆川島)에서 쉬었다.

 18일 웅포에 다시 접근하여 웅천 앞바다 송도에 복병선을 배치하고 적선을 유인해 내어 가까스로 3척을 격침했다. 19일부터 21일까지 바람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22일 다시 웅포로 들어가 이번에는 경쾌선(輕快船) 15척을 5척씩 교대로 접근시켜 총통으로 공격, 가까스로 3~4척의 적선을 깼다. 5일까지 비바람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칠천량과 사화랑(沙火郞)을 오가다 6일에 또 다시 웅포를 공격했다.

 여전히 배를 요소에 숨겨놓고 육지에 굴을 파고 둘러앉아 조총을 비오듯 쏘아댔다.

 이순신은 새로운 상황에 부딪쳤다. 적 수군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배를 숨기고 응전해 오지 않자 조선군 측에서 전과를 올릴수 없었다.

 이순신은 화선(火船)을 대량 건조하여 화공(火功)으로 적선을 섬멸하는 전법을 새로 개발했으나 적의 배만을 보두 태우면 육상 적병들의 최후 발악의 피해가 클 것으로 판단하고 중단했다.

 4월3일 각기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순신 함대 제5차 1개월 여의 출동은 적선 10여척을 깨는 전과를 올리는데 그쳤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15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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