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4)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4)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19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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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군 폐허首都 한성에 첫 無血入城

  그런데 3월10일에 한성에 도착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의 2월27일자 명령서에는 한성의 일본군이 아무때든 축차적으로 철군해도 좋다는 철퇴 허가가 내려져 있었다. 군사전문가다운 적절한 명령이었다.

 풍신수길의 철퇴명령을 숨기고 한성의 일본군으로 부산까지의 안전 퇴군을 보장받기 위해 소서행장(小西行長)이 나서서 明나라 유격장 심유경(沈惟敬)과 용산(龍山)에서 강화회담을 벌였다.

 심유경은 "조선의 두 왕자를 돌려 보내고 일본군 장수 1명을 인질로 남겨둔 뒤 군사를 거두어 물러가지 않으면 40만 대군으로 일본군을 전멸 시키겠다"고 위협했고 소서행장은 "두 왕자는 돌려 보내나 명군이 구화사(構和使)를 보내고 철퇴하면 일본군도 4월8일 한성에서 철군하겠다"고 버텼다.

 황진(黃進)은 전라도 동복(同福)현감으로 권율휘하서 이치전(梨峙戰)에 참전,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가 회복된 뒤 익산(益山)군수가 되어 선거흡(宣居洽)를 따라 水原으로 와 있다가 충청도 조방장(助防將)에 임명되어 안성에 있었다. 황진은 수시로 일본군을 기습하고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어 북도정칙이 철군에 앞서 퇴로 확보를 위해 안성의 황진을 치기로 하고 2월30일 죽산성(竹山城)을 나섰다. 그러나 성을 나선 일본군은 성 밖의 황진 잠복군에 곧바로 걸려들었고 뒤이어 들이닥친 황진 본군에 성ㅇ르 점령 당하고 음죽현성(陰竹縣城)으로 퇴각했으나 추격해 온 황진군에 다시 밀려 충주까지 도망가고 말았다.

 일본군이 한성 철퇴를 준비하는 동안 벽제관 전투에서 일격을 맞고 전의를 잃은 명군은 핑계만 있으면 퇴각하려 했다.

 이여송(李如松)의 주력이 개성으로 물러나 있는데 미처 조달이 안돼 군량이 떨어져 갔다. 명군 장수들이 이를 이유로 이여송이 퇴군을 주장하자 이여송이 노하여 도체찰사(道體察使) 유성룡(柳成龍) 호조판서(戶曹判書) 이성중(李誠中) 경기도감사(京畿道監司) 이정형(李廷馨)을 불러 뜰 아래 무릎을 꿇어 앉히고 꾸짖으며 군법으로 처단하겠다고 소리쳤다.

 나라꼴이 이지경이었다. 유성룡이 사죄하고 때마침 군량 실은 수십척의 배가 강화(江華)로 부터 들어왔다.

 그러나 이여송은 끝내 부총병 왕필적(王必迪)만 개성에 남겨놓고 평양으로 철수했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한뒤 선조(宣祖)는 1월18일 의주(義州)를 떠나 20일 정주(定州)에 도착, 묘사주(廟社主)를 모시고 성천(成川)에 온 분조(分朝)의 왕세자 광해군(光海君)과 합류했다. 선조는 2월17일 정주를 떠나 3월23일에야 평양에 도착, 24일에 대동관(大同館)에서 이여송을 만났다.

 4월7일 이여송은 한성의 일본군 철퇴가 확실해지자 평양에서 다시 개성(開城)으로 진주했다.

 8일 한성의 소서행장과 明나라 심유경의 강화회담이 겉으로 타결됐다. 일본군이 끈질기게 요구한 明나라 구화사(構和使)로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보내온 서일관(徐一貫)등 2명이 한성에 들어오자 심유경과 이들 2명 그리고 포로로 잡힌 두 왕자와 대신 일행을 데리고 조선 백성 1천여명을 앞세워 4월18일부터 일본군 5만3천명이 한성을 나서 한강부교를 건너 남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19일 명군 선봉 사대수(査大修)가 파주(坡州)로 진주했다.

 유성룡이 이여송을 만나 퇴각하는 일본군에 대한 추격전을 주장했으나 이여송은 두 왕자의 신변 안전을 이유로 듣지 않았다.

 유성룡이 전라도 순찰사 권율, 순변사 이빈(李賓), 경기도방어사 고언백(高彦伯), 이시언(李時彦), 정희현(鄭希賢)등을 불러 비밀리에 추격을 지시했다.

 행주에서 이긴 뒤 파주에 와 있던 권율이 뛰었다. 20일 휘하 전군을 인솔하고 전속력으로 강행군하여 한성으로 뛰어 들었다.

 유서깊은 조선의 200년 수도 한성은 개전 스무날만인 1592년 5월3일 일본군 소서행장 가등청정군에 무혈 점령된 뒤 만 11개월 보름만에 권율 휘하의 전라도군에 의해 무혈 수복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19일에 모두 한성을 떠났고 20일에는 전군이 한강을 건넌 뒤였다.

 권율이 전군을 그대로 전진시켜 한강으로 추격했으나 뒤따라온 明군 유격정 척금(戚金)이 가로 막고 나섰다.

 "제독(提督) 이여송의 명령없인 추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원수들에 일대 설욕전을 벌이려 했던 권율군은 장탄을 토하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날 이여송 등 명군 주력도 한성에 입성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15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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