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특집] 우리 앞에 우뚝 서신 의열 투쟁의 산 증인 이기 선생
[광복특집] 우리 앞에 우뚝 서신 의열 투쟁의 산 증인 이기 선생
  • 김계식
  • 승인 2020.01.16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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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른 들 활짝 펼친 호남평야 한복판 김제 성덕 대석마을
 학문을 좋아하는 한 소년이 키워내는 꿈
 실사구시 경세치용에
 이용후생 깊이 알 박힌 실학을 연구
 벌써 반계 유형원 다산 정약용에 마음 기울인 터에
 전제 연구에 저만큼 한 발 앞서 나갔다

 자신의 안위 가정의 평안 뉘 바라는 일 아니랴만
 풍전등화인 나라를 구하지 않고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민 씨 일가의 족벌정치를 어찌 그냥 넘길 수 있으며
 청, 러, 일의 외세 침략을 어찌 묵과할 수 있으랴
 끓어오르는 혈기를 짓누를 수가 없어 분연히 일어섰으니 

 구국을 위한 동학농민운동의 함성 귀에 들리고
 흰 옷 입은 백성들의 횃불 눈을 밝히니
 단숨에 내리달려 전봉준 장군을 만나
 혁명군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나라 구할 것을
 힘차게 주장하는 열혈청년단 선봉이 되었다 

 언제나 강한 자는 약한 자의 힘을 먹고 크는 것
 러·일 전쟁이 끝난 자리에 밀려오는 미국의 입김
 포츠머드 강화회의 장에 쫓아가
 우리의 입장을 호소하려 했지만 가는 길마다 막혀
 계획은 메아리도 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비통을 씻어낼 새로운 방법 찾기에 눈을 돌려야 했다
 정신무장이 국권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라 믿어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고
 애국지사 장지연 박은식 등과 뜻을 모아
 애국 계몽 단체인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사회계몽 운동에 앞장 선 우국지사 이 기 

 그러나
 눈앞에 우쭐대고 다니는 나라 팔아먹은 역적들을
 그냥 지켜볼 수는 없는 일
 을사오적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자신회를 조직하고
 직접 매국노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7년 유배형을 당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형이 풀린 후에도
 서울에서 호남학회를 세워 애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09년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이 비통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1968년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지만
 이 분의 이루지 못한 한을 닦는데 어찌 내비칠 수나 있는 일이랴
 영령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김계식(시인, 교원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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