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김만경 넓은 벌에 끝없는 우국충정
김제 김만경 넓은 벌에 끝없는 우국충정
  • 김영택
  • 승인 2020.01.1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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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특집 <5>

 벽골제와 지평선의 도시 김제는 호남의 명산인 모악산이 동으로 펼쳐 있고 그 자락엔 천년 고찰인 금산사가 있다. 또한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강과 동진강이 너른 들판을 기른다. 특히 황금물결이 넘실거리는 가을 들판은 손꼽히는 비경이다.

 김제는 호남 최대의 곡창지인 금만 평야를 배경으로 전국 쌀 생산의 40분의 1을 생산하는 전국 최대의 미곡 생산지이다. 또한 동양 최대의 가장 오래된 벽골제를 중심으로 해마다 대한민국 최우수 축제로 불리는 김제지평선축제가 열린다.

 도작문화의 발상지 김제는 백제 때 벽골이라 했다. 이는 바로 볏골(벼의 고을)이라는 뜻이다. 금만평야를 ‘징게맹개 외배미들’라 부른다. ‘외배미’란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 배미로 툭 트였다는 데서 온 말로 ‘김제 만경 너른 들’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김제는 넓은 평야가 발달하여 하늘과 땅이 닿는 유일한 곳이며 계절을 따라 변하는 들판의 모습은 풍요롭고 역동적인 자연 경관이다.

박영택 시인

 □ 산미증식 계획

 1918년 일본에서 쌀 소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세웠다. 우리 농토를 자국의 식량공급기지로 삼기 위해서 계획한 산미증식운동은 1920년부터 3차에 걸쳐 추진한 식민지 경제정책으로 농지 개량과 농사 개량이었다. 농지 개량에 의한 증산 계획은 관개시설 개선, 지목교환, 개간, 간척에 의한 농지 확장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농사 개량에 의한 계획은 품종 개량, 퇴비 장려, 적기 번식, 제초운동 등을 전개해 수확량을 증가시키자는 것이다.

 김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경강 제방을 쌓기 위해 마을을 강제로 이주시켜 강줄기를 돌리는가 하면, 밭으로 사용하던 토지를 논으로 전환시켰다. 갯벌 앞으로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고, 갯벌에는 염생 식물과 각종 어패류가 지천으로 널려 있던 곳을 농토로 바꾸거나, 그곳에 흙을 쌓아 사람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광활 간척지는 마치 노예들이 사는 마을처럼 수로를 따라 일렬로 12채나 24채씩 집이 늘어서 있었다. 마치 군대 막사처럼 죽 늘어선 모양이 그들의 목적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했다. 농민들은 그곳 일본인 농장에서 뼈를 깎는 고통으로 일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굶주림뿐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쌀 생산에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를 알 수가 있는 일로, 병충해를 막기 위해 아이들까지도 벌레를 잡는 데 동원되었다. 특히 밤에 이화명나방을 잡기 위해 학생들에게 논 가운데 촛불을 켜서 불빛을 보고 몰려드는 나방을 잡아 오는 숙제가 주어졌고, 목표량을 반드시 채워야 하였다하니.

 □ 소작쟁의

 전라북도는 1930년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작쟁의가 발생한 지역이다. 평야 지대가 많은데다가 일제의 토지 정책으로 자작농은 줄고 소작농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착취한 노동력에 비해 임금은 턱없이 낮아서 농민들은 궁핍을 면치 못했다. 죽산면 하시모토농장, 김제읍 이사카와농장 등 일본인 지주가 경영하는 농장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노동착취와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밭 사이의 경계가 만개라 하여 붙여진 지명 ‘만경’은 그만큼 광활한 경작지이고 많은 쌀을 수확하다보니 쌀 수탈도 컸다. 소작쟁의 또한 그와 비례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소작쟁의는 소작료를 내려달라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점차 일본농장을 상대로 한 항일민족운동으로 변했다. 김제평야에서 일본인 지주 하시모토는 서포리 개간지를 중심으로 죽산면 농토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런 사실 하나만 미루어 봐도 한반도 토지수탈의 역사와 우리 농민들의 소작쟁의는 불가분의 함수 관계였다.

 김제에서 발생한 소작쟁의는 1926년부터 1939년까지 14년간 총 5,998건이었다. 김제에서 발생한 소작쟁의는 1926년부터 1939년까지 14년간 총 5,998건이었다.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3·1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국민들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라북도의 3·1운동의 중심 세력은 주로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의 종교계와 학생, 농민들이었다. 동학농민과 의병활동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음에도 굴하지 않고 121회에 걸쳐 175,000여 명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데에 의미가 크다. 이 과정에서 사망, 실종, 부상자가 수십 수백 명이 발생하였다.

 김제 지역의 3·1운동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일 김제읍 천도교 교구실에 독립 선언서가 도달되어 교구장 공문학은 교인들을 통해 죽산면 부량면 등 각 면과 인근 마을에까지 전포했다. 3월 4일에 김제역 대합실에서 독립 선언서 20장 1꾸러미가 발견됐고, 3월 6일에는 김제읍에서 독립 선언서가 거리에 산포되고 운동이 진행되려 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김제의 본격적인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 금산면 원평리에서 최초로 일어났다. 수류면 구월리의 청년 배세동이 4월 13일 전주의 만세 운동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와, 16일 같은 마을 사람인 전도명 전도근 전부명 이완수 김성수 등과 함께 의논하여 20일 원평 장날 만세 시위를 펼칠 것을 결정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준비했다.

 3월 20일 오후 금산면 원평장터에서 수백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 운동을 했다. 그러나 정보가 누설되어 익산 주재 헌병 100여 명이 투입되어 몸수색과 도로 차단을 하는 등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같은 날 오후 6시 헌병대가 퇴각하자 산에 숨어있던 농민들은 미리 준비해 온 태극기를 가지고 장터로 나와 사람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 헌병들의 무력 제지에 의하여 군중은 해산되고 배세동 등 주동자 10여 명은 체포당해 6개월에서 1년의 강제 형을 당했다.

 원평장터에서의 독립 만세에 이어 4월 4일에는 만경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경공립보통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경 장날 만세 시위가 있었다. 같은 날 정오 교사 임창무가 3, 4학년 학생 전부를 교정에 모아 놓고, 독립의 타당성을 설명한 후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자 학생 100여 명이 대열을 지어 시장으로 나가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순찰 중이던 순사와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하였지만, 만세 대열은 한참 동안 시장을 돌며 시위행진을 펼쳤다. 결국 김제경찰서 무장대가 출동하여 폭력 진압으로 대열은 해산되고 주동 인물들은 검거되었다.

서강사 장태수 위패 봉안
서강사 장태수 위패 봉안

 □ 독립운동가

 항일 투쟁을 몸소 실천한 애국지사, 순국의 표상인 장태수 선생은 신명학교를 창설하여 배일사상을 함양했으며, 이기는 1907년 나인영 등과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만주 등지에서는 정화암, 광복군 지대장 이종희, 2대 도지사를 지낸 장현식 등이 독립 투쟁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외에도 여기 기리지 못한 독립운동가가 50여명이 있다. 그들은 학생이며, 허리띠를 졸라매며 수차례 독립자금을 댄 사람까지 다양한 계층의 애국자들이었다. 아직도 공훈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국혼은 살아있다, 고 외치며 일제의 총칼 앞에 스러져간 숭고한 선열들! 맨손으로 오직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

 그들께 두 손을 모은다.

애국지사 남정 이종희 장군 추모비

 □ 민중계몽운동의 선구자이며 독립투사, 해학 이기 선생

 김제 만경에서 태어난 선생은 호남 3절의 한 분으로 불렸다. 을사조약 체결 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사회 계몽운동을 벌이고 봉건적인 제도 개혁과 신문물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07년 나인영 등과 같이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권중현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실패하여 7년 동안 진도로 유배되었다.

 외세를 막으려면 백성들이 깨우쳐야 한다고 『호남학보』를 발간하여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전문대학 설립과 온 국민의 학문 의무화를 강조하셨다.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학문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깨어나라 외치던 선각자

 일제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구원하고자 계몽 운동을 벌이는 데 온 힘을 다하신 위대한 애국자였다. 『해학유서』를 남기신 그분에게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영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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