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움직인 조선의 다완(茶碗)
일본을 움직인 조선의 다완(茶碗)
  • 김미진 기자
  • 승인 2020.01.12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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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68>
대명물 이도다완(井戶茶碗)

 우리는 어떠한 것을 보여주거나 드러내기 위한 형식화에는 조금은 멀어져 있다. 있어도 있는게 아니고, 보여도 보이는 것이 아닌, 없는 듯 있는 듯한 자연스러움, 이것이 우리의 미덕으로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그 가치를 드러내기보다는 존재하는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었다.

 중국 송대(960~1279)의 차문화는 말차(抹茶)가 유행했던 시기이다. 말차는 찻잎을 미세하게 가루 내어 다완(茶婉)에 가루와 뜨거운 물을 부어 다선으로 저어 거품을 내어 마시는 형태이다. 이러한 음다방식은 고려와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고 고려의 청자다기가 더욱 정교하여지기도 하였다.

 송나라의 유명한 태평(太平)노인은 당시 “고려청자의 신비스런 비취색은 송나라의 청자보다 뛰어나며 천하제일이라”고 했다. 일본의 학자는 “만약 신에게 도(道)에 도달하는 길을 말한다면 지금 나는 한마디로 고려의 도자기를 통해서라고 대답하겠다.”라고 말하는 등 비췻빛고려 다기에 대해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이렇듯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중국과 일본인들에게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일본 사회의 다도 확산은 다도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 중국산 다기를 이용한 다회가 유행하게 되었고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추구하였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승려 출신 무라타 슈코(1422~1502)는 형식 중심으로 흐르던 다도에 선(禪)의 정신을 도입하여 소통을 이루고자 하였다. 선의 경지를 손님과 주인의 정신적인 소통으로 강조하였다. 화려하고 세련된 중국 다기를 사용한 차회가 정갈하고 절제된 방식의 내면을 강조한 차회로 변화하였다. 이는 와비차 정신으로 이어졌다. 순수와 한적함을 뜻하는 와비는 기존의 귀족적인 다도와는 다른 면을 강조하며 당시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떠오른 무사들과도 통하였다. 사실상 다도를 지배의 도구로서 활용한 측면도 있다. 몰락한 구 지배층들이 지방으로 물러나고 그들의 후원을 받던 문화인들은 신 지배층에게 의탁하게 되면서 와비 정신은 다도의 확산에 기여하게 된다.

 일본의 다도사에서 다도를 내면의 정신과 한가로운 정취인 와비차 정신으로 완성시킨 것은 조선의 다완이다.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고 다도구의 소박함과 순수함을 강조한 와비차 사상으로 일본의 다도가 완성되는 시기에 고려 다완이 중심이 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고려다완은 고려의 청자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고려다완은 일본인들이 붙인 명칭으로, 고려말 분청다완을 비롯하여 조선초에 만들어진 다완의 이름을 총칭한다. 고려라는 왕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조선에서 만들어진 다도(茶道)용 도구이다. 조선에서 일상용기로 제작된 뒤 일본에서 다도용 다완으로 사용되거나 처음부터 다도구로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 한국 도자를 다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연대가 고려말 조선초기 이후로 추정된다. 그중 이도다완(井戶茶碗)은 고려다완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6세기 후반의 유명한 이도다완은 쌀 1만석~5만석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도다완의 경우 주문 생산되어 다완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제작된 사발을 차인들이 다도에 적합한 것을 골라 사용했다.

 차회를 여는 사람들은 명성이 있는 다완을 사용하여 자신의 권세를 과시했다. 그러다보니 명품 다완은 높은 가격으로 유통되었고 소유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기도 하였다. 일본의 다성(茶聖) 센리큐(1522~1591)가 대표적인 조선 도자기 애호가였다. 당시 화려하고 정교한 중국 도자기에 비해 질박하고 넉넉한 조선 도자기가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당시 일본의 다완은 다완으로 전용된 조선의 그릇과 일본적 취향이 가미된 조선에서 주문생산한 다완, 일본이 직접 제작한 다완 등이 있다. 고려다완은 일상용기의 전용으로 시작하여 점차 일본측 주문 생산으로 이어졌으며 와비차의 완성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다도가 발달하면서 다도구에 대한 미의식도 확립된다. 이도다완은 우리의 담백한 문화를 품고있지만 지금은 일본의 국보가 되어있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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