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 이항복 선생에게 청렴을 묻다
백사 이항복 선생에게 청렴을 묻다
  • 장진석
  • 승인 2020.01.12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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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부패 관련 신문기사나 뉴스를 접하면 청렴을 많이 떠올릴 것이다. 청렴은 ‘마음이 고결하고 재물 욕심이 없음’의 뜻을 지니고 있다.

 과거 청렴은 검소한 것을 강조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 청렴은 기본적인 예절부터 검소, 절제, 질서 등 모두 포함된 개념으로 생각되며 공직자로서 더욱더 지켜야 할 덕목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렇다면 부정부패 없는 청렴한 공직사회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옛 선조들의 청렴사례를 통해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청렴한 공직사회에 한 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선대에서 청렴의 모범이 될 만한 분들은 누가 있을까? 조선왕조 5백년간 녹선된 청백리는 2백여 명이 있지만, 오늘은 그 중에서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청렴의 상징이 되었던 한 분, 이항복 선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항복(1556~1618)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선조 13년(1580)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호조참의 동승지 등의 벼슬을 거치고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당쟁의 조정에 힘썼고 후에 청렴한 관리로서 ‘청백리(淸白吏)’에 추대되었다.

 1617년 선조의 정비인 인목대비가 덕수궁에 유폐되고, 평민으로 만들자는 폐모론에 극렬하게 맞섰던 그는 결국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별세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 “나라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여 이러한 견책을 받았으니 내가 죽거든 조복으로 염을 하지 말고, 평소에 입던 옷과 띠를 사용하라”말로 근검절약의 본을 보여주었다. 백사라는 호처럼 깨끗한 모래 한 알로 평생을 산 이항복의 일생은 선비정신의 구현이자 인간 승리의 표상이었다.

 공신의 자리에 오르고 영의정까지 지낸 사람이 청백리에 녹선 된 사실 자체가 그를 대변해 준다. 청렴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청광의 상태도 되지 않고 해학과 웃음 속에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조선 왕조 최대의 위기 상황이던 임진왜란에 슬기롭게 대응하고 국난을 극복한 사람이 이항복 선생이었다.

 이항복은 많은 벼슬살이를 했지만 그에 맞지 않게 셋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권력과 부, 명예가 대대로 세습되던 조선시대에 이처럼 청빈한 생활을 했다는 것은 가히 청백리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축년(1613년) 옥사가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이춘복’이란 사람이 고발되어, 의금부 도사가 경내를 수색했지만, 문제의 이춘복은 잡지 못하고 엉뚱하게 ‘이원복’이란 사람을 잡아왔다. 그럼에도 국청에서 심문이 있었는데 재판장이던 이항복이 ‘내 이름도 비슷하니 나부터 먼저 진술하여 변명해야 죄를 면하겠구만“라고 하자, 옆에 있던 좌의정, 우의정이 웃었다. 일순가에 삼엄했던 분위기가 바뀌어 옥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이항복의 기발한 농담으로 무고한 백성의 목숨을 건진 재판이었다.

 이항복 선생의 일화처럼 청렴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시민의 억울한 일을 겪지 않게 공직생활을 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청렴이란 공정한 과정에 따라 반칙이 허용되지 않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부터 바른 생각과 행동으로 주위의 모범이 되어 보훈행정을 선도해 나갈 수 있도록 오늘 출근길에도 청렴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장진석 국립임실호국원 현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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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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